족보풀이
작성자 운영위원
작성일 2013-02-28 (목)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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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간공 조운흘(石磵公 趙云仡) 묘지 자명(墓誌 自銘)

석간공 조운흘(石磵公 趙云仡) 묘지 자명(墓誌 自銘)




趙云仡本豐壤人高麗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恭愍代興安君李仁復門下登科歷仕中外佩印五州觀風四道雖無大聲績亦無塵累年七十三終廣州古垣城無後以日月爲珠璣以淸風明月爲尊而葬于楊州峨嵯山南摩訶耶孔子杏壇上釋迦雙樹下古今聖賢豈有獨存者咄咄人生事畢




조운흘은 본관이 풍양(豐壤)이며 고려 태조의 신하인 문하시중 조맹(趙孟)의 13대 손이다. 공민왕때 흥안군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서 과거급제한 뒤 중외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다섯고을의 인(印)을 찻고 네 도(道)의 풍속을 관찰했다. 비록 큰 치적은 없었으나 시속의 비루함도 없었다.


73세에 병 때문에 광주의 고원성(古垣城)에서 삶을 마쳤다. 후사가 없다. 해와 달을 옥구슬로 삼고 청풍명월을 술잔으로 삼아 옛 양주 고을의 아차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마가야(摩訶耶)




공자는 행단 위에 계셨고


석가는 쌍수 아래 계셨네.


고금의 성인과 현인 가운데


그 어찌 득존한 분 있었나.


쭛쭛


내 인생 끝이로구나.




孔子杏亶上 공자행단상  釋迦雙樹下 석가쌍수하


古今聖賢人 고금성현인  豈有獨存者 기유독존자


咄咄 돌돌              人生事畢 인생사필




말을 억제하는 고통스런 모습이 눈에 훤하다.


본관이 무엇이고 누구의 후손이며 언제 과거에 급제하고 어떤 벼슬을 거쳤으며 어느 때에 삶을 마쳤는지 간단하게 기록하고 그 끝에 어디에 장사 지냈다고 적었다. 관직 생활에 대해서는 “비록 큰 치적은 없었으나 시속의 비루함도 없었다”라고 간단히 평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73세에 병으로 인해’ 삶을 마쳤다고 적었을 따름이다. 큰 명예도 없고 큰 잘못 없이 한세상을 보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삶이 평탄하였을까? 마음이 평온 하였을까?


조운흘(趙云仡 : 1332 ~ 1404)은 풍양현 사람이다. 공민왕 6년인 1357년에 급제하고 안동서기로 뽑혔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옮겨 합문사인이 되었다. 형부원의랑으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는데 공민왕이 복주, 즉 지금의 안동으로 파천하자 그때 시종했다. 그후 국자감 직강으로 옮겼고 전라도, 서해도, 양광도 3도의 안렴사를 역임했다.


공민왕 23년(1374년) 전법총랑으로 있던 조운흘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있으면서 스스로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라 하고는 바깥을 드나들 때 소를 타고 다녔다.


자은사(慈恩寺) 승려 종림(宗林)과 방외(方外)의 교제를 맺었다.


우왕 3년(1377년)에 좌간의대부에 제수되어서는 서연(書筵)을 다시 열어 왕세자에게 독서궁리(讀書窮理),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하도록 종용하라고 상소했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교시사에 이르렀으나 우왕 6년(1380년)에 사직을 청해서 광주 고원강촌(古垣江村)에 거처했다. 그리고 종래 있었던 판교원과 사평원을 경영해서 원주를 자칭하고는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서 부역하는 사람들과 노고를 같이했다. 그리고 날마다 소를 타고 정금(鄭金)과 함께 판교원과 사평원을 다니면서 행려자를 구제했다.


“누런 소를 타고 청산 옆에 있으니


추하고 추한 몸뚱이가 비단 한 필 값도 안 되네”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우왕 14년(1388년)에 다시 전라판서가 되고 밀직제학으로 옮겼다. 당시 지방 정치를 다스리기 위해 명망 있는 사람을 도관찰출척사로 선발해야 한다는 의론이 있어 조운흘이 서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왕에게 글을 올려 대청, 소청, 교동, 강화, 진도, 절영도, 남해, 거제등 20여 개 큰 섬을 군관들에게 식읍으로 주어서 왜적을 방비하고 옥토와 어염의 이익을 발굴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운흘은 나무랄 데 없는 치적을 쌓았다. 하지만 서해도관찰사가 되어 있을 때 그는 매양 아미타불을 불렀다. 그때 친구가 수령으로 있었는데 조운흘의 창밖에 와서 “조운흘! 조운흘!”하고 불렀다. “너는 어째서 내 이름을 부르느냐?”하자 그 수령은 “공은 부처가 되려고 염불을 하니 내가 공을 부르는 것도 또한 공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오”했다. 둘은 서로 보고 웃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리라 예견하고 도회(韜晦 : 자기 자신의 덕을 숨김)하려고 했던 것이다.


1388년 임견미(林堅味)가 이인임(李仁任), 지윤(池奫) 등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다가 최영, 이성계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임견미는 1361년 홍건적의 난 때 나주도병마사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호종했고 1370년에는 부원수로 원나라 동녕부 토벌에 참여했으며 1374년에는 부원수로서 제주 목호(牧胡)의 난을 평정했다. 우왕 때도 왜구 토벌에서 공을 세우고 1384년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렇게 공적을 세우고 권력을 쥐게 되었지만 임견미는 최영과 이성계와 뜻을 달리하다가 결국 살해된 것이다. 임견미의 사람들이 벼슬에서 쫓겨나 유배가는 모습을 보고 조운흘은 이런 시를 읊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숲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돌에 앉으니


어젯밤 산중의 비바람이 거칠더니


개울 가득 흐르는 물에 꽃잎이 떠오네.




柴門日午喚人開 시문일오환인개  步出林亭坐石苔 보출림정좌석태


昨夜山中風雨惡 작야산중풍우악  滿溪流水泛花來 만계유수범화래




개울물에 떠오는 꽃잎이란 무엇인가? 버려진 인재들, 소진된 생명력이다. 떨어졌기에 애처롭고 더욱 아름다운 생명인 것이다.


고려말의 정계는 평온하지 않었다. 누구나 혁명파인지 구왕파인지 선택해야만 했다. 그는 구왕파에 속했지만 세상이 어지러워지리라 짐작하고 미친 체하고 지냈다. 또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인 청맹(靑盲)이 되었다 하고는 벼슬을 살지 않었다. 그러다가 난이 평정된 뒤 눈을 문지르면서 내 병이 다 났다고 했다. 창왕이 즉위한 후 징소되어 첨서밀직사사에 제수되었다가 동지밀직사사에 올랐다. 하지만 공양왕이 즉위한 뒤 2년 되는 1390년에는 내직에서 견디지 못하고 계림부윤이 되었다.


마침내 새 왕조가 섰다.


조의생과 임선미 등 70여명은 두문동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차원부는 평산 수운암동에 은거했는데 하륜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모함하여 정도전, 함부림, 조영규와 더불어 그를 때려 죽였다. 이양증은 운돈하여 살다가 차원부의 죽음을 분하게 여겨 타어회(打魚會)에서 막걸리 담은 병을 깨부수었다. 사람들이 그를 파료옹(破醪翁 : 막걸리 병을 깬 노인이란 뜻)이라 불렀다. 길재는 등잔을 던졌고 조운흘은 책상을 치며 분개했다.


이씨 왕조는 조운흘에게 강릉대도호부사의 직을 주었다. 조운흘은 잠시 그 벼슬에 있었으나 곧바로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광주의 별서로 돌아갔다.


강릉에 있을 때 구산역이라는 작은 역에서 지은 시가 있다. 제목이 구산역(丘山驛)이다.




구슬 눈물 방울방울 술잔에 지고


양관곡 불러 사람을 전송하네


태산이 평지 되고 동해가 마를 때에야


비로서 구산역 슲은 이별 끊어지리.




珠淚雙雙落玉巵 주루쌍쌍락옥치  陽關三疊送人時 양관삼첩송인시


太山作地東溟渴 태산작지동명갈  始斷丘山泣別離 시단구산읍별리




양관곡은 위성곡이라고도 한다. 양관은 중국 감숙성 돈황에 있는 관문이다.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원이가 안서 절도사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면서(送元二 使安西) 시에


 


위성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을 촉촉하게 적셨는데


객사에는 퍼렇게 버들 빛이 새롭구나.


그대에게 권하여 다시 한 잔 술을 올리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가면 친구가 없을 걸세.




渭城朝雨浥輕塵 위성조우읍경진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청청유색신


勸君更進一杯酒 권군갱진일배주  西出陽關無故人 서출양관무고인




라고 했다. 이 노래가 송별곡이 되어 뒷부분을 세 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을 “양관삼첩”이라고 한다. <구산역>시는 한 세상의 종언을 애도한 이별가와도 같다.


이씨 왕조는 조운흘에게 검교 정당문학의 벼슬을 주었다. 검교의 벼슬이라면 관례에 따라 녹봉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는 사절했다. 광주 고원촌으로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이 찾아와서 벼슬살이를 권했어도 소매 넓은 베적삼에 삿갓 쓰고 나와 길게 읍하였을 뿐 한 마디도 하지 않었다. 김사형은 “뻣뻣한 이 늙은이의 태도는 지금 어찌할 수가 없구나!”하고 돌아갔다.


조운흘은 묘지명에서 마가야란 말을 사용했다. 마가야나제파(摩訶耶那提婆)라고 하면 대승천(大乘天)을 말한다.


묘지명의 마지막에 붙인 운문의 명문에서 조운흘은 자신을 공자나 석가의 경우에 견주어 보았다. 교만해서 그런것이 결코 아니다. 공자는 행단 위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하였다고 전한다. 행단은 현재 산동성에 있는 공자의 사당 앞에 있는 단이다. 한편 석가는 쌍수 아래서 제자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쌍수는 인도의 발제하(拔提河) 가에 있던 두 그루의 사라(娑羅)나무이다. 두 분의 삶과 죽음을 보면 성인이라도 홀로 자족적이지는 않었다. 그 분들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다. 사람들은 유아독존(唯我獨存)이라는 말을 쉽게 하고 특립독행(特立獨行 : 홀로 서서 우뚝히 나아감)이란 격언을 자주 내뱉는다. 하지만 옛 성인들을 보라. 그들도 결코 홀로 자족적이지 않었던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서 조운흘은 자기의 삶을 돌아보았다. 내 삶은 특립독행이라 할 수 있는가? 유아독존이라 할 수 있는가? 제자를 둘 수조차 없었던 나는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새 왕조의 감시 아래서 교육도 자유롭지 못했기에 고독한 늙은이로 살아갈 따름이다.


내게 남은 것은 죽음이다. 그 죽음이 화려할 리 없지만 그렇다고 흉(凶) 없지도 않을 것이다. 새 조정에서 내리는 제수를 차리고 멋진 석상을 무덤 앞에 세울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을 옥구슬로 삼고 청풍명월을 술잔으로 삼을 것이기에.


사람들은 조운흘을 두고 품격이 높고 구애됨이 없는 선비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그의 묘지명을 보면 그 사실을 거꾸로 짐작할 수 있다. 불만의 감정을 삭이면서 일흔셋의 나이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으리라. 조선왕조는 <고려사>에 조운흘의 자찬묘지명을 실어둠으로써 그의 개결한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이 그의 위로가 될 것인가?




참고문헌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역<국역 고려사>권112, 열전 25. 조운흘. 경인문화사.


*국역 해동역사 제68권 인물고2. 조운흘, 민족문화추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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