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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계자
작성일 2010-10-03 (일)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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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양공파의 뚜렷한 선조들
                        우리 희양공 파의 별과 같은 선조의 세계世系
 -- 금번 정순왕후 조대비의 부친 묘소 참배를 기하여 뚜렷이 빛나는 우리 조문趙門의 선역들에 대하여 약력과 계보를 올립니다. --  

(一). 좌랑공(安平 8세) : 회양공(愼)의 장자
태조 8권, 4년(1395 을해 / 명 홍무(洪武) 28년) 9월 16일(정미) 1번째기사
각도에서 보고한 효자·절부 등을 정려하고 복호하게 하다.
임금이 좌·우정승에게 분부하였다.
“지금 각도(各道)에서 보고한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은 모두 실적이 있으니 마땅히 포상을 더하고 문려(門閭)를 세워 정표하되, 구실[役]이 있는 자는 복호(復戶)하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구휼하여 주어 풍속을 가다듬게 하라.”
                 ------중략-----
춘주(春州) 565) 의 낭천 감무(狼川監務) 조안평(趙安平) 의 모친 이씨(李氏) 는 일찍이 그의 가장을 잃고 과부로 살면서 수절하고 아들을 교양시켜 벼슬을 하게 하였다.    발췌-조선왕조실록-

(二)조엄 [趙曮, 1719~1777] : 본관 풍양(豊壤). 자 명서(明瑞). 호 영호(永湖). 시호 문익(文翼). 이조판서 상경(商絅)의 아들. 1738년(영조 14)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내시교관(內侍敎官)·세자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을 지낸 뒤 175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다음 해 정언(正言)이 되었다. 1757년 교리(校理)·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

1760년 창원마산창(昌原馬山倉)·진주가산창(晉州駕山倉)·밀양삼랑창(密陽三浪倉) 등 조창(漕倉) 3개의 증설을 건의하여, 세곡수송(稅穀輸送)의 폐해를 시정하여 민폐를 줄이고, 공물(貢物)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여 국고(國庫)의 안정을 기하였다. 이어 대사헌·부제학·예조참의를 지내고,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東萊)와 제주도(濟州島)에 재배하게 하여 최초로 고구마 재배를 실현하였다. 이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이조판서·제학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 때 무고를 받아 파직되고, 뒤에 혐의가 풀려 재차 대사간·이조판서를 지냈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 일파의 무고로 평북 위원(渭原)에 유배되어 있던 중 아들의 직소(直訴)로 김해(金海)에 이배(移配)되었으나 병사하였다. 영조를 도와 산업의 발전과 건전한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기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해사일기(海槎日記)》 《해행총재(海行摠載)》 등이 있다.

(三)  조만영 (趙萬永 1776∼1846(영조 52∼헌종 12)) : 정순왕후 조대비의 부친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厓). 본관은 풍양(豊壤). 풍양조씨의 좌장(座長)으로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한 조씨세도의 핵심인물이었다.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지평(持平)·정언(正言)·겸문학(兼文學) 등을 지냈다. 1816년 전라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들을 다스렸고 1819년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827년 이조판서로서 어영대장을 겸하여 실력자로 부상, 풍양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세력을 다투었다. 1839년(헌종 5) 기해사옥(己亥邪獄)으로 가톨릭교도에 대한 일대 탄압을 전개하여, 정권경쟁에서 안동김씨세력을 꺾는 호기로 삼아 풍양조씨의 세도를 확립하였다. 1845년 궤장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나 아들 병구(秉龜)가 죽자 실의에 빠져 병으로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글씨에 능해 영흥(永興) 《궁달리기적비(宮達里紀績碑)》과 임천(林川) 《회양부사조신묘표(淮陽府使趙愼墓表)》 등을 썼다. 저서에 《동원인물고(東援人物考)》가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  

(四). 조인영 (趙寅永 1782∼1850(정조 6∼철종 1)) : 조대비의 삼촌
조선 후기 문신.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시호는 문충(文忠).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근무한 후 대사헌·경상도관찰사·예조참판·대제학·형조판서·호조판서 등 요직을 지내며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조만영(趙萬永)과 함께 풍양조씨 세도의 기반을 쌓았다.
1839년 우의정으로 있던 중 기해사옥(己亥邪獄)을 일으켜 가톨릭교도 탄압을 주도하고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지어 임금에게 올렸으며 1841년 영의정에 올랐다. 1847년(헌종 13)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외세 종교가 성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원(書院)의 양성과 경학에 밝은 학자 양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금석학(金石學)에 관심을 기울여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문장·글씨·그림 등에 능하였고,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운석유고》가 있다.  

(五). 신정왕후조대비 (趙大妃)
조선 익종(翼宗)의 비(妃). 성은 조씨(趙氏). 본관은 풍양(豊壤). 풍은부원군 만영(萬永)의 딸로 1819년(순조 19) 세자빈에 봉해지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로, 1857년(철종8)에는 대왕대비로 각각 진봉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안동김씨(安東金氏)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흥선군(興宣君) 이하응과 결탁, 고종을 즉위하게 하고 수렴청정하였다. 1866년(고종 3)까지 계속 수렴청정을 하며 관리탐학의 방지, 진휼(賑恤), 황해도 도장(導掌)폐해의 엄금, 공물(貢物) 폐단의 제거 등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였다. 왕실의 불화와 조씨가문의 쇠잔, 기울어가는 국운(國運) 등으로 적막한 말년을 보냈다. 능은 수릉(綏陵)이다.  -이상 백과사전에서 발췌

*世系 : 전직공(지린, 1세)→회양공(신, 7세)→한산군(온지, 9세)→독암공(종경, 12세)→교리공(수익, 14세)→풍안군(흡, 15세)→학당공(상경, 18세)→문익공(엄, 19세)→풍원부원군(만영, 21세)→조대비(정순왕후, 익종비, 22세)

                               발췌작성자 : 면희(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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