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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청계자
작성일 2010-09-11 (토)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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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우의정 조공(상우) 시자諡章

본작품은 본인의 족선조族先祖로서, 이조 숙종조에 우의정을 역임하고 경종景宗을 왕으로 올려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강공東岡公 휘 조상우趙相愚의 시장으로 직계 후손인 동익東瀷 족조께서 그 분의 문집을 발행하기 위하여 번역을 의뢰한 글이다. 09. 3. 5.

이글은 동익 족조의 의견은 묻지 않고 함께 조상을 숭배하는 의미에서 여기에 올렸는데 혹시라도 허락을 얻지 않은 데 대하여 동익 족대부나 다른 관계자 들로부터 불쾌하게 생각할 소지가 있다고 하면 알려주시는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연락처 : cmh1022@empal.com     면희 백

                        의정부우의정조공 시장(諡狀)

                                                           찬자撰者 : 겸   재 조태억謙   齋 趙泰億
                                                           번역飜譯 : 족후손    면희族後孫    冕熙

 공의 휘는 상우(相愚)이고 자는 자직(子直)이며 호는 동강(東岡)이다. 풍양조씨(豐壤趙氏)는 고려시중(高麗侍中) 휘 맹(孟)이 시조인데, 회양부사 휘 신(愼)에 이르러 우리 조선조에 들어오게 된다. 그 뒤 3 세(世)를 지나 장수현감(長水縣監) 세찬(世賛)은 휘 기(磯)를 낳았는데 기는 사헌부감찰증이조판서로서 숙부(叔父)인 정국공신풍양군(靖國功臣豐壤君) 세훈(世勛)의 계자가 되었다. 이분이 바로 공[相愚]의 증조이다. 조고 휘 희보(希輔)는 한원(翰苑 : 藝文館)을 역임하였는데 광해군의 혼란한 시대를 당하여 이이첨(李爾瞻)을 논박[論斥]한 연유로 관직이 크게 올라가지 못하고 분승지(分承旨)의 직위로 졸하였는데 증좌찬성(贈左贊成)에 봉하여졌다. 선고 휘 형(珩)은 숭록대부 행예조판서증영의정으로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두터운 덕으로써 일찍이 중망을 받아 나라의 신신(藎臣 : 충성스런 신하)이 되었다. 비(妣)는 사천목씨(泗川睦氏) 참판 휘 장흠(長欽)의 딸로서 숭정 경진년(인조18년, 1640년)에 영덕현(盈德縣)의 관사[衙舍]에서 공을 낳았다.

4-5세에 이미 문자를 이해하였고, 6세에 학곡 홍상공(鶴谷洪相公 : 瑞鳳)을 알현하자 홍상공이 방석을 주고 앉으라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앉지 않았으며 또 그 지방에서 나는 비단 한 끗을 주어 옷을 지어 입으라고 하였으나 받지 않고 사양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지만 선비[儒生]로서 감히 비단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상공께서 크게 기특히 여겼다. 자라서는 백헌 이문충(白軒李文忠 : 景奭)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문충공께서 크게 사랑하였다.

18세(효종 8년, 1657년)에 사마시(司馬試 : 생원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이 해에 동춘 송문정공(同春宋文正公 : 浚吉)에게 수업하였는데 문정공께서 앞으로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어느 학자도 이 사람보다 앞서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무신년(현종9년, 1668년)에 관학(館學 : 성균관과 四學)의 많은 선비들이 신덕왕후부묘(神德王后祔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때 서울과 지방의 많은 선비들이 동참하여 공을 소수(疏首)로 추대하였다. 그 다음해인 기유년에 숙종[肅廟]이 세자로 있을 때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자 공이 장명(將命 : 명령 전달자)으로 뽑혔는데 역시 유림으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이었다. 임자년(현종 13년, 1672년)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제수되었다가 숙종이 왕위를 계승하자 옛 궁속(宮屬)으로서 6품계로 승진[陞六]되고 곧이어 연천현감(漣川縣監)으로 제수되었다.

을묘년(숙종 원년, 1675년)에 동춘공이 죽은 후에 삭직[追削] 당하는 형벌에 처하자 공은 동문(同門)인 홍득우(洪得禹)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부당함을 역설하는 항소(抗疏)를 올렸다가 남평(南平)에 귀양 가게 되었으나 그 다음해 풀려 돌아왔다. 기미년(숙종 5년, 1679년)에 부친 충정공의 상을 당하고 신유년에 상복을 벗은 뒤 바로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인 임술년(숙종 8년, 1682년)에는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나갔는데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백성을 다스렸으며, 유교의 교화를 일으켜 인재를 만드는 일로 근본을 삼았다.

공은 일찍이 큰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은 모두 공이 뒷날 훌륭한 재상[公輔]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과거시험[公車]에 막혀 한 동안 크게 떨치고 일어나지 못하자 재상 김수흥(金壽興)이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파격적으로 기용해 줄 것을 특별히 청하였다. 임술년(숙종 8년, 1682년, 43세) 겨울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비로소 급제하였으나 마침 복(服)을 입게 되었다. 다음해인 계해년 겨울에 전시(殿試)에 급제하고 그 다음해인 갑자년에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처음으로 입대(入對 : 임금의 자문에 응답함)한 자리에서 동래부사 한구(韓構)를 논박하여 개정(改正)하기를 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김환(金煥)을 추국(推鞫)하라는 의논은 온 나라의 똑 같은 생각인데 집의(執義) 이굉(李宏)등이 공론[公議]를 무시하고 정계(停啓 : 논의를 막는 일)하기에 바빴으니 바라건대 모두 체직(遞職 : 직위 해제)해 주소서’하니 상이 크게 성이 나서 문제를 시끄럽게 만들었다고 나무란 뒤에 특

별히 공의 직위를 파했다. 그러자 삼사(三司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공의 파직이 부당함을 간쟁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이 뒤로 여러 번 대성(臺省 : 사헌부와 사간원)의 추천을 받았으나 번번이 낙점(落點)을 받지 못했다. 가을에 훈련원 낭청[訓局郎]에 차임되어 서학교수(西學敎授)를 겸하게 되고, 이어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제수되어 호남 암행어사(湖南暗行御史)로 나갔다가 겨울에 복명(復命)하였다. 을축년(숙종 11년, 1685년)에 지제교[三字銜 : 知製敎]로 옥당(玉堂 : 홍문관)과 이조록(吏曹錄)에 올라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병인년 봄에 이조좌랑으로 옮겼으며 자의대비(慈懿大妣 : 인조의 계비 楊州趙氏)의 옥책(玉冊)을 쓰고 통정(通政 : 정3품 당상관)에 승품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바로 전라감사로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관(臺官)이, 준직(準職)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급(資級 : 품계)을 환수하기를 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고 아울러 번임(藩任 : 지방장관)도 체직하게 한 뒤에 사인(舍人)으로 제수하고 부응교로 옮기게 하였다.

그동안 옥당에 있으면서, 임금이 후궁에 절수(折受)를 받도록 하라고 한 명령을 거두기를 청하였고, 또 호서지방에 첩가미(帖價米)를 탕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징명(李徵明)이 왕의 외척과 궁녀[宮姬]에 대한 논박을 하다가 견책(譴責)을 당하였는데 이것도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구해 주었고, 또 강연(講筵 : 임금의 공부 자리)을 자주 열어 조정의 기강을 진작시키고 언로(言路)를 넓히라고 청하였는데 임금은 모두 기쁘게 받아 들였다. 또 평안감사 윤개(尹堦)와 황해감사 임규(任奎)가 모두 번임(藩任)에 맞지 않는다고 논박하였는데 임규가 상소하여 도리어 공이 태인현감으로 있을 때 허록(虛錄 : 장부의 허위기재)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여 마침내 체직당하고 양주 쌍수역(楊洲雙樹驛)에 유배되었다. 당시 공의 형님이신 정공(正公 : 相槩)도 유배지에 있었다. 정묘년(숙종 13년, 1687년) 봄에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조아무개는 집에 늙으신 어머니가 있는데 형제가 모두 유배당하고 있으니 정리로 보아 가긍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특명으로 석방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어머니 목부인(睦夫人)의 상을 당하였고, 기사년(숙종 15년, 1689년)에 복을 벗었다. 이때 나라에는 큰 변화[己巳換局 : 서인의 몰락]가 왔던 해로 공은 사도시정(司導寺正)에 임명되고 홍천목사(洪川牧使)로 나갔다가 다음해인 경오년에 사임하고 돌아왔다. 신미년에 사성(司成)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신년(숙종 18년, 1692년)에는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제수되었다가 좌통례(左通禮)로 옮겼는데 하찮은 일로 직위를 빼앗기고 풍양산장(豐壤山庄)에 물러가 살았다. 다음해인 계유년에 사성으로 다시 제수되고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다.

갑술년(숙종 20년, 1694년, 공의 55세) 봄에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옮겼으며 통정계(通政階 : 정3품 당상관)에 승품되었다. 얼마 안 되어 갑술경화(甲戌更化 : 서인의 재집권)가 되어 옛 사람들을 불러들일 때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조(趙) 아무개를 오랫동안 외직[邊職]에 둘 수 없다’고 아뢰어 임금이 특명을 내려 경직(京職)으로 불러올리라고 하였다.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기고 이어서 동부승지로 제수되었다. 을해년 봄에 이조참의가 되고 여름에 다시 대사간겸승문원부제조(大司諫兼承文院副提調)가 되었다. 당시에 가뭄의 재앙이 심하였는데, 지방 감옥에 갇힌 많은 죄수를 빨리 처리해 주고 부역과 세금[役布]를 함부로 받아들이는 폐단을 없애어야 재앙이 사라진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가을에 다시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병자년(숙종 22년) 봄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고 또 승지로 옮겼으며 다시 예조와 이조에 들어갔다. 가을에 부제학이 되었으며 겨울에 또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정축년 봄에 승지로 옮겼다가 비변사부제조(備邊司副提調)에 임명되었고,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발탁되었으며 간선계(嘉善階 : 종2품)에 승품되었다.

무인년(숙종24년, 1698년) 봄에 서시사(西市事)가 있어서 당연직인 호조참판을 보내야 하므로 이조에서 공을 수망[首擬 : 첫째 추천자]으로 올렸으나 임금께서 일부러 부망[副擬 : 두 번째 추천자]으로 차출하고 말하기를 ‘내가 알기로 아무는 병이 있고 또 번거롭게 멀리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다시 대사간으로 제수하였다. 그러자 공은 상소하여 전답의 경계를 바로잡고 군역(軍役)을 고르게 실시하기를 청한 뒤에 이어서 오도일(吳道一)이 사실보다 지나치게 벌을 받았음을 말씀드리니, 임금께서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어서 대사성(大司成)과 도승지겸동의금(都承旨兼同義禁)을 역임하고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관상감(觀象監)과 평시서(平市署)와 승문원(承文院) 등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는데 대사성으로 가장 오래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인재를 양성시킨 효과라고 칭찬하였다. 겨울에 부제학으로 옮겨서는 임금에게, 비용을 많이 절약하는 방법은 한문제(漢文帝)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승휘전(承暉殿)의 화재에 대하여 임금의 자문에 응답[入對]하기를 근래 형벌이 중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청하기를 약품을 나누어서 유행병을 구제해 줄 것이며, 군안(軍案 : 軍籍)을 정리하는 것이 백성의 위급함을 누그러뜨리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다.

단종[端廟]를 추복(追復 : 뒤에 복위함)한 뒤에 공이 사릉(思陵 : 단종비 정순왕후 능)의 옥책(玉冊)을 써 올렸는데 신주를 종묘에 모시던 날[祔廟日] 임금께서 직접 종묘에 나가려고 하자, 공은 온 나라에 유행병이 한창 번지고 있으므로 행차를 정지하라고 상소로 청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크게 나무라고 공을 파직시킨 뒤에 다시 임용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정원(政院)과 홍문관[玉堂]에서 교대로 파직이 부당하다고 간쟁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특명으로 이전과 같이 복직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해인 기묘년 봄에 사릉의 역사(役事)를 감독하기 위하여 경기감사로 옮겨 제수하였다가 능의 일이 끝난 뒤에 가의(嘉義大夫 : 종2품)로 승품되었다.

경진년(숙종 26년. 1700년) 봄에 이조참판겸동지경연(吏曹參判兼同知經筵)으로 옮기고 강연(講筵 : 임금의 공부 자리)에 자주 들어가 좋은 말로써 임금을 깨우치어 주었는데 그중에 ‘어진 인재에게 벼슬을 맡길 일과 붕당(朋黨)을 타파할 일, 그리고 진퇴(進退)를 공평하게 해 줄 일’을 더욱 정성스레 반복해서 말씀 드렸으며, 또 우부빈갱(右副賓客)과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를 겸하였다. 전형을 맡은 관직[銓地 : 吏曹]으로 임명된 지 반년 만에 하찮은 일로 정승[相臣]이 논박하는 글[箚子]을 올렸고 지평(持平) 이덕영(李德英)은 공의 인사정책[注擬]이 치우치고 있음을 비판하는 글[疏]을 올리자, 공은 거기에 대하여 변명하는 글을 올리고, 이어서 사직을 청하여 체직(遞職)되었다.

이보다 앞서 맹만택(孟萬澤)이 과거시험의 담당관이 되었다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공은 이러한 비난 의논을 임금에게 올리려는 대관(臺官)의 글을 막았으므로 이덕영은 공의 인사정책이 치우치다고 논박한 것이다. 그리고 이관명(李觀命)이 또 이 사실에 대하여 조사해 볼 것을 청하자, 의금부[禁府]에서 맹만택이 직접 소명한 자료를 가지고 와서 공을 나문(拿問 : 체포하여 문초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여 임금이 허락한 것이다. 정원과 옥당에서 전형을 맡은 관원을 체포하여 문초하는 것은 사체(事體)에 맞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따르지 않고 마침내 공을 대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석방하였으나 이로부터 공은 관직을 제수하는 명령을 여러 번 사양하고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다음해인 신사년 가을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서거[昇遐]하자 부제학겸산릉도감당상(副提學兼山陵都監堂上)으로 제수하니 부득이 나아가 사은(謝恩 : 감사하고 받음)하였다. 곧 이어 형조판서로 발탁되었는데 공은 여러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지만 임금께서 특별히 관직에 나올 것을 권유[開釋]하였다. 당시 내옥(內獄)이 일어나자 공이 상소하여 전은(全恩)하도록 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종사(宗社)를 의탁할 곳이 세자에게 있고, 온나라 백성들의 희망도 세자에게 달려 있는데 궁중에 비록 불미스러운 변고가 발생하였더라도 마땅히 한 번 더 돌이켜 보고 장래를 생각하는 것이 선처하는 도리가 됩니다. 어찌 다른 일과 똑같이 법으로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어서 우참찬겸내섬종묘제조(右參贊兼內贍宗廟提調)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오년(숙종28년, 1702년, 공의 63세)에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때 양사(兩司 : 사헌부, 사간원)가 힘을 합쳐 남(南 : 九萬) · 유(柳 : 尙運) · 윤(尹 : 趾完), 이 3 정승을 논박하는 일이 발생하자, 공은 그 논박이 자신의 의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인피(引避)하여 체직되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이번에 공을 파직(罷職)하라고 논박하자 임금이 여러 번 엄한 명령을 내리어 공을 나무랐으므로 공은 서울에 살지 못하고 연하여 고향의 농장으로 돌아가 머물렀다.

당시 이조[銓地 : 吏曹]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대각(臺閣 : 사간원과 사헌부)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애써 배척하였다. 그래서 경대부의 반열 중에 문벌이 높은 집안의 사람들을 애써 막았는데 막을 흠집을 못 찾은 사람이 바로 공과 서종태(徐宗泰) 그리고 서문유(徐文裕)로서 이 세 사람이 연하여 헌장[大司憲]이 되었다. 그러나 말 한 마디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바로 탄핵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 세 사람을 삼도헌(三都憲)이라고 일컬었다.

계미년(숙종29년, 1703년) 여름에 지중추겸도총관(知中樞兼都摠管)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원접사(遠接使)로 중국의 칙사(勅使)를 의주[灣上]에 가서 맞이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그 칙사가 돌아갈 때 배웅하는 반송사(伴送使)로 차임되었으나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하였다가 체직되고 예조판서겸좌부빈객이 되었는데 좌부빈객은 왕세자의 스승으로 경종(景宗)이 세자로 있을 때 글을 배우는 자리에서, 공자와 맹자의 출처(出處 : 내력)에 대하여 쪽지에 글로 적어 물어왔으므로 공은 거기에 대한 답으로 설(說 : 설명하는 문장)을 지어 올리고 겸하여 성인을 존경하여야 하는 뜻의 존주(尊周)의 의미를 덧붙였다.

갑신년(숙종30년, 1704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공이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중요한 자리는 두루 거쳐 당시 공을 앞지를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공이 판서[正卿] 자리에 오른 지 4년이 되도록 한 번도 이조판서에 임명되지 않아 당시 공론이 모두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다음해인 을유년 봄에 서종태공이 이조판서로 임명되었는데 사양하는 상소를 써 올리기를 ‘조아무개에 대한 여러 사람의 바람은 신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이조[天官]에 추천하지 않고 신만 홀로 추천[擬望]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다음 날 좌의정[左相] 이여(李畬)가 임금을 입대(入對)한 자리에서 말하기를 ‘조 아무개는 바로 송준길의 문인인데 오도일(吳道一)이 그의 스승인 송준길을 모욕하였는데도 그와 절교하지 않았습니다. 사제 간(師弟間)에 지켜야 할 의리가 미지(未盡)하여 신이 영의정[首相]인 신완(申玩)과 의논하고 실제로 그를 이조판서[銓長]으로 추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은 오도일공과 교분이 매우 두터웠고, 오도일이 스승인 송준길을 비방하고 모욕한 일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의정 신완도 일찍이 임금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오도일이 억울하다는 것을 역설하였는데 지금 와서 공을 이조판서에 추천하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했다.

또 공이 오공(吳公)에게 준 시에 ‘북쪽 바람에 눈이 내리고…’의 뜻을 가진 ‘북풍우설(北風雨雪)’ 등의 말을 쓴 일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다른 뜻을 빗대어 표현하였다고 심하게 모함하였으므로 공이 다시 상소를 올려 해명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좋은 말로 비답하기를 ‘시의 내용에 있어서 의리에 부합되지 않은 점을 발견할 수 없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이미 꿰뚫어 알았다’라고 하였다. 뒷날 이 정승(좌의정 이여)이 공을 찾아와 자신이 경연자리에서 임금에게 주달한 것이 실속에서 벗어났었다고 또한 사과하였다.

우빈객겸장악사역원제조(右賓客兼掌樂司譯院提調)로 승배(陞拜)되어 병술년(숙종32년, 1706년) 봄까지 대사헌(大司憲)을 세 번 했고 그 사이에 판윤(判尹)과 형조판서겸지의금(刑曹判書兼知義禁)과 지경연(知經筵)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해 여름에 판의금부사[判義禁]로 특별히 제수되었는데 우의정[右相] 김창집(金昌集)이 조그마한 사건[微事]을 가지고 경연자리에서 논박[筵駁]하였으므로 공은 사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와 판의금부사로 제수되었다.

시골 유생[鄕儒] 임부(林溥)가 투서[投匭]하기를 ‘신사옥사[辛巳獄] 때 윤순명(尹順命)의 공초(供招) 중에 ‘모해동궁(謀害東宮)’이라는 4 글자가 있었는데 그 당시 옥사를 맡은 여러 신하들이 누락시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 임부를 신문하여 사실을 밝히도록 하라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공과 죄의정 서종태(徐宗泰)공을 책임담당관[委官]으로 삼아 공과 함께 그 사건을 조사하라고 하였다.

조사가 시작되자 임부는 박태춘(朴泰春)과 그 당시 신사문사랑(辛巳問事郞 : 조사관)인 강이상(姜履相) · 여필중(呂必重)을 끌어들이었으므로 먼저 이 세 사람을 불러 조사하였는데 세 사람이 모두 분명하게 자백하지 않았다. 마침내 형벌을 실시하기로 하자 박태춘은 강이상에게 들었다고 하고 강이상은 여필중에게 들었다고 하였다. 여필중은 18 도(度)의 형벌을 받은 뒤에 비로소 자백[承欵]을 하였다. 유언명(兪彦明)과 이성조(李聖肇)도 그 당시 문사랑이었으므로 붙들려 왔는데 이성조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고 유언명은 ‘윤순명의 초사(招辭)에 다만 동궁이 어디가 좋으냐[何好]하는 말만 들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애초에 임부의 투서가 나왔을 때 김창집(金昌集)은 신사년 옥사의 의금부당상관[辛巳禁堂]으로 상소하여 자백[自首]하기를 ‘어디가 좋으냐’ 뜻인 기호이자(豈好二字)만 있었다고 하였다. 여필중과 강이상 두 사람도 공초(供招)하기를 ‘좋지 않다’라는 뜻의 불호(不好)라고 만 했다고 했다. 그러나 유언명의 공초에 이르러서, 여필중이 ‘해치려고 하였다’는 뜻의 모해(謀害)라고 하였고, 유언명은 하호(何好)라고 했다고 하여 두 사람의 공초가 같지 않았으므로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본질에 따라 불가불 분명히 사실을 밝혀 처리하여야 했으므로 공께서는 임금님이 계신 자리에 나아가 죄벌을 의논하자고 하여 모두들 그렇게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최석정공이 홀로 말하기를 ‘이일은 사실을 밝힐 방법이 없는데다가 자꾸 이사람 저사람 끌어들일 염려가 있다고 하고 마침내 죄를 참작하여 처리하기로 임금에게 품의하여 청하였다. 그리하여 여필중과 강이상과 같은 수인(囚人)은 법률에 따라 변방으로 유배[邊配]하고 임부는 사형에서 죄를 줄여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신사참국대신(辛巳參鞫大臣 : 옥사의 처리에 참여한 대신)인 신완(申琓)과 이여(李畬) 이하는 모두 파직하였으며 이세백(李世白)은 이보다 앞서 죽었으므로 논죄하지 않았다. 당시에 김춘택(金春澤)도 임부의 투서에 끌어들인 관계로 유배지에서 붙잡혀 왔었다. 그러나 옥사는 이미 결정이 되어 신문할 것도 없고 또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내지도 않게 되자 공은 임금에게 청하기를 ‘김춘택은 많은 사람[千人]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성에 하루를 머물면 하루만큼 우환이 되니 즉일로 유배지에 보내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이잠(李潛)의 상소가 나와서 임금께서 먼저 친국(親鞫 : 직접 국문함)하고 전교(傳敎)를 내리어 말하기를 ‘애초에 임부의 옥사를 명백하게 단죄하지 못하여 이러한 자들이 계속 일어난다’라고 하고 명령을 내려 다시 임부와 여필중 등을 잡아들이게 하여 국문하게 하였다. 공은 비로소 불안하여 의금부사[金吾]와 병조판서[本兵]를 여러 번 사직하였으며, 최석정공도 또한 사건에 끌려들었다. 그 뒤에 임부는 형을 받다가 죽었고 여필중도 ‘모해(謀害)’를 ‘불호(不好)’로 변경시켰다고 하여 지난 번 옥사의 판결[獄案]은 번복되고 말았다. 또 이덕영(李德英)이 임부의 옥사 때의 문사랑[問郞]들이 옥사를 처리하는데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많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논박하였으므로 임금의 비답에 엄중하게 나무라는 전교가 내렸으므로 최석정공과 서종태공 두 사람과 함께 공은 도성 밖에 나아가 책벌[譴責]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정해년(숙종34년, 1707년, 공의 68세) 여름에 이르러 지중추부사[知中樞]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로 옮겼다. 그러나 내의원제조[藥院]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형조판서에서 체임되고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왕가[宮家]에서 영변(寧邊) 지방 두 곳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세금[折受]의 폐단을 아뢰고 그 세금을 받는 일을 정지해 달라고 청하자 임금께서 특별히 허락하여 주었다. 공은 8년 전인 경진년에도 임금을 모신 경연자리에서 이일을 아뢰었었는데 지금에 와서 비로소 파하게 된 것이다.

가을에 기로소(耆老所)에 잔치를 베풀고 임금이 술[宣醞]과 음악을 하사하였는데 대신(大臣)은 비록 나이가 70 살이 안 되어도 고례에 따라 참가할 수 있으나 2품이하의 경대부[列卿]들은 여기에 참가하는 예가 없었다. 그러자 영의정인 최석정공[崔公]이 옛날 중국 사마온공[溫公 : 사마광]의 고사를 들어 임금에게 아뢴 뒤에 공을 데리고 그 잔치에 동참하게 되니 그 당시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겨울에 겸지중추부사[兼知春秋]로 경연[講筵]에 나아가 ‘농사가 흉년이 들었는데 왕자(王子)의 집[第宅]을 짓는 일은 하늘에 대해 근신하고 반성[修省]하는 데 어긋나므로 풍년이 들 때까지 조금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니 검소하고 절약하는데 힘쓰소서’하고, 아뢰고 이어서 춘추(春秋)를 강하였다. 그리고 효종[孝廟]의 뜻을 이어받아 남한산성의 수치를 씻어야하는 생각을 잊지 말기를 청하자 임금께서 모두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 지 며칠 뒤에 임금이 친히 지은 시[御製詩]를 내려 주었는데 <시경>의 국풍(國風) 중에 국력이 쇠약함을 한탄한 비풍장[悲風 : 匪風章]과 훌륭한 군주를 그리워하는 한천장[下泉]의 느낌이 있었다. 이조판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무자년(숙종35년, 1708년) 봄에 혜민서제조(惠民署提調)로 겸직되고 예조판서로 옮긴 뒤에 의금부[金吾]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겸직하게 되었다. 겨울에 다시 이조판서로 제수되었는데 경연자리에서 서북지방 사람들의 인심을 굳게 결속시키는 방법을 아뢰고 또 어떤 한쪽 편의 사람에 대하여 낙점을 미루는 잘못[勒點之過]을 아뢰었다.

기축년(숙종36년, 1709년, 공의 70세) 봄 조참(朝參)。에 나아가 다시 임금은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도리[建中建極]를 진술하고 이어서 물러난 대신(大臣)들을 불러들일 것과 아울러 낙점을 미룬 여러 사람들을 채용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이관명(李觀命)이 영의정 최석정[崔相]을 상소로 탄핵한 일에 대한 말에 이르자 임금이 시위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런 사람들에게 낙점을 미루었던 것은 하루라도 편한 날을 보내고 싶어서 그러하였는데 요즈음 이조판서의 주달한 말을 듣고 실로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하여 그 말대로 채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상소가 또 나왔으니 이렇게 하여 가지고 나라 일을 해나갈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이해에 공은 기로사[耆社]에 들어갔다. 다시 상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致仕] 물러나겠다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玉堂 : 홍문관)의 홍우서(洪禹瑞)와 이택(李澤) 등은 공이 경연자리에서 주달한 여러 말들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 잇달아 헐뜯고 비방하자 공은 힘껏 사양하여 이조판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판윤(判尹)으로 제수되었다. 가을에 판돈령(判敦寧)으로 옮기고 내의원제조[內局]와 판의금부사[金吾]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내의원제조를 겸직하게 되고 영의정 최공(崔公)이 도제조가 되었다. 임금의 건강이 오래도록 좋지 않았는데 겨울이 되자 종기[腫患]가 또 발생하여 백여일 동안이나 오래 낫지 않았다.

경인년(숙종37년, 1710년) 봄에 갑자기 하교를 내리었는데, 내의원[藥院]에서 임금의 병을 등한히 한다고 나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날 당장 비망기[備忘]를 내려 내의원의 3제조(三提調)를 모두 교체하라고 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하자 임금은 거듭 엄한 하교를 내리어 신하로서 듣기 거북한 말이 많았는데 그 중에 춘추시대에 세자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명령을 거역한 승지들은 모두 나국(拿鞠 : 잡아다가 국문함)하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3제조는 삭직시켜 내어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대신(大臣)과 옥당(玉堂) 그리고 삼사(三司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 잇달아 글[箚]을 올려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임금의 비답은 더욱 준엄하였다. 이렇게 임금의 노여움이 겹치자 모든 신하들은 황공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보다 앞서 최석정공이 임금의 병환이 조금 나은 틈을 타서, 때때로 대신(大臣)들을 불러들여 해야 될 시무(時務)를 강구(講究)할 일과 대정(大政 : 都目政)을 실시하여 인사정책이 뒤로 밀려 나가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엄중한 하교가 내린 지 수일 뒤에 좌의정 서종태공이 글을 올려 노여움을 풀기를 청하고 이어서 최석정공이 말한 내용을 조금 덧붙여 말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자신의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병이 나은 것으로 여기게 한 것이 내의원[藥院]의 죄라고 하여, 그 뒤 경연 자리에서도 여러 번 이것을 가지고 말하였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은 비로소 준엄한 하교가 내리게 된 까닭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서종태공의 차자에 의하여 벼슬을 파직시켜 내보내라는 명령을 거두게 되었다. 또 헌납(献納) 송택상(宋宅相)의 상소에 의하여 비망기 중에 <춘추>의 사실에 비유한 말은 빼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최석정공은 이미 견책(譴責)을 당하고 있었는데 양사(兩司)의 이교악(李喬岳)과 이방언(李邦彦) 등이 합계(合啓 : 같이 계문함)로 형벌을 내리기를 청하고, 또 시약(侍藥)하는 일을 삼가지 못하였음을 허위로 꾸며 임금의 뜻을 맞추니 마침내 삭직축출[削黜]을 하도록 윤허하였다. 공도 더욱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아 사직단자[尋單]를 올리고 본직에서 물러났다.

여름에 대사헌 유득일(兪得一)이 경연 자리에서 공이 지난겨울 내의원이 입진(入診)할 때 병으로 불참한 일과, 의논하여 계문[議啓]할 때 여러 번 참여하지 않았다고 탄핵하고 벼슬을 삭탈할 것을 청하니 임금은 그냥 파직만 하라고 명령하였다. 정호(鄭澔)가 잇달아 대사헌[都憲]이 되어 삭탈하라는 의논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니 마침내 윤허하였다. 그런데 공은 그 당시에 허리가 아픈 요통(腰痛)이 갑자기 심하여 도제조(都提調 : 영의정)가 품의를 올려 임금이 조리하도록 허락하였었고 입진할 때와 의계(議啓)할 때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단 하루였었다.

겨울에 헌납(献納) 이익한(李翊漢)이 공을 위하여 상소를 올려 변명하니 얼마 되지 않아 특명으로 급첩(給牒 : 임명장을 줌)하고 세말[歲抄]에 판돈령(判敦寧)으로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신묘년(숙종38년, 1711년)에 판의금부사로 특별 제수되고, 비로소 지금까지의 노여움을 풀고 용서[開釋]하였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리하여 부득이 나와서 직책에 참여하고 국문하는 일[省鞫]도 살피었다. 이조판서로 옮겼는데 공이 병을 얻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임금은 두 번이나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지어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 달이 지난 뒤에 병이 회복되었으나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의 직책에서 체직되고 예조판서와 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를 겸하여 제수 받았다.

여름에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이보다 앞서 어떤 사람이 민진장(閔鎭長) 정승에게 묻기를 현재 중책을 맡을 사람이 누구일 것 같으냐고 하니 민정승은 단독으로 공을 추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또 유상운(柳尙運) 정승에게 물으니 유공은 재상이 될 만한 사람을 세어보다가 문득 말하기를 조공(趙公)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조공은 재주가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하자 유공이 대답하기를 “대신이라는 직책은 임금을 올바른 도로 인도하는 데 있는데 조공은 반드시 임금을 잘못되고 치우치는 쪽으로 이끌지는 않을 것일세.”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병이 위중하여지자 최석정 정승이 홀로 근심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덕성과 도량이 끝내 대신의 직위를 맡고 말 것이니 병이 아무리 깊어도 근심할 것이 못 되네.”하였는데 이때 이르자 최 정승의 말이 과연 부합되었다.

당시에 오래도록 비가 오지 않고 가물었다. 그러다가 공이 정승으로 올라가던 날에 단비가 흡족하게 내리었다. 그러자 도성 사람들은 조정승의 비라는 뜻으로 조상우(趙相雨)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의 이름자 중에 우(愚)자와 우(雨)자가 음이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공은 정승으로 승진하는 것을 상소하여 굳게 사양하였는데 임금께서 이르기를 ‘경은 재주와 덕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지금 정승으로 결정되자 백성들이 모두 흡족해 하였소.’하였다. 공은 사직하는 상소를 4 번을 올린 뒤에 마침내 입대(入對)하러 나갔다. 그리고 공이 생각하는 좋고 나쁜 일과 당파에 치우치는 행위를 버릴 일을 진술하고 정호(鄭澔)의 유배를 석방하여 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공이 큰 병을 앓은 뒤로 걸음걸이가 좋지 않아 궁전의 뜰아래 내려 가다가 넘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임금께서 놀라 소관(小官)을 시켜 부축[扶掖]하여 나가게 하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는 일을 상례로 하였다. 그리고 초모엄(貂帽掩 : 담비 가죽 모자)을 하사하였는데 모자를 만드는 바치[工人]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우상[右議政]은 머리가 크니 널찍하게 만드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은 이것으로 남다른 대우[異數]를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백성에게 세금으로 호포(戶布 : 가정에 부가되는 베) · 정포(丁布 : 장정에게 부가되는 베) · 구전(口錢 : 인구에 부가되는 세)을 거두자는 의논이 있었다. 가을에 공이 차자(箚子 :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우리나라의 법은 명분을 중히 여기어 베를 거두는 법[徵布法]과 돈을 받는 법[納錢規]은 평민에게만 부가되고 선비계급[士族]에게는 미치지 않았는데 이것이 변하지 않고 전통처럼 내려온 지가 거의 2백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인심(人心)이나 세상 형편이 날마다 나빠져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에 있는데 시대의 흐름을 생각지 않고 갑자기 새 법[新法]을 만들어 베나 돈을 사족(士族)에게까지 징수한다면 결과적으로 세금을 받기 위하여 잡아다가 가두고 매질을 해야 하는 것은 서민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식견이 있는 선비야 그래도 나라의 법을 따르겠지만 성질이 강경[强梗]하고 불평을 많이 하는 무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만 품게 되어 이들 중에 나라에 화란(禍亂)을 만들어 내는 자는 다만 강도질이나 절도질만 하는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는 일[噬臍之悔]이 생길 것입니다.’

임금께서 그 의견을 옳다고 받아들였다. 가을에 여가를 얻어 충주(忠州)에 있는 선영[先壠]에 분황(焚黃)하고 돌아와서 충주지방의 민막(民瘼 : 백성들의 고충)을 주달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이 오래도록 체납한 군포[舊逋軍布]를 탕감[停捧]해 주기를 청하고 또 여러 신하들이 주달한 내용 중에 시행할 만한 것은 즉시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모두 품의한 뒤에 처리하라고 명령하였다.

겨울에 중궁(中宮)의 천연두[痘患]가 완전히 나아지자 공은 차자를 올려 사직하겠다고 아뢴 뒤에 유배[徒配] 이상의 죄인은 그 죄를 참작하여 너그럽게 풀어주고, 금년에 전세[田租]와 신포(身布 : 신역 대신 바치는 베) 중에 아직 거두지 않은 것은 역시 탕감(蕩减)해 주어서 중궁 쾌유에 대한 경사를 백성과 함께하는 뜻을 보여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그리고 사직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위로하는 말로 연거푸 깨우쳐 주어 억지로라도 나오도록 하였다. 공은 노쇠한 병이 심하여져서 마침내 사직 단자를 내고 체직할 것을 구한 것이 30여 차례나 되고, 글로 상소한 것도 5,6 차례나 되었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윤허하지 않고 몇 번이나 나오기를 권유함으로 부득이 다시 나아왔다.

임진년(숙종39년, 1712년, 공의 73세) 봄에 정시(庭試)를 보여 선비를 뽑는데 급제한 사람이 모두 서울 사람이었다. 그러자 공이 특별히 과거를 보여 지방의 선비들을 위로하자고 하여 3인을 더 뽑았는데 그 중 2명은 서울 선비이면서 호적을 지방에 둔 자였다. 그러자 공은 그 2 명을 임금님에게 아뢰고 급제 명단에서 삭제였는데 수석으로 합격한 자가 송인명(宋寅明)으로서 바로 공과 친한 친구[執友]의 손자였는데도 급제에서 빼어버렸으니 당시 사람들은 공의 처사가 공정함을 칭찬하였다.

그 때 청국(淸國) 차사(差使) 목극등(穆克登)이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에 가려고 다시 우리나라에 갈 길을 인도해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자 공께서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길이 험하여 가기 어렵다는 뜻으로 알리십시오’ 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오는 것을 중지해 주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나 인금은 말썽이 생길까봐 염려되어 그 말을 따르지 않으니 공은 다시 말하기를 ‘청국의 차사가 오는 뜻은 국경의 경계를 정하기 위함이니 물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발원처(發源處)는 말할 것도 없이 물의 남쪽은 모두 우리 땅이라는 것을 먼저 반접사(伴接使 :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사신)에게 알려 그쪽에서 묻는데 따라 대답하도록 하십시오’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성으로 서북(西北) 지방에 살며 천인 신분을 면한 면천자(免賤者)는 양민(良民)의 예에 따라 본토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또 ‘각 고을의 계집종들은 자기 고장으로 찾아 데려와야 한다는 주현비쇄환본토법(州縣婢刷還本土法)을 엄격히 하여 비록 높은 벼슬인 공경(公卿) 집안에서 데려다가 기르던 것들도 모두 보내어 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십시오’하였다.

북한산성[北漢]에 임금이 직접 행행[親幸]하는 날이 마침 태묘(太廟 : 종묘)에 행사가 있는 날이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종묘에 행사가 있으면 임금의 수레는 지나갈 수가 없으니 예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또 죽은 자나 어린아이에게 세금으로 매긴 베를 거두는 폐단[白骨黃口徵布之弊]은 간교한 아전[奸民]들이 억지로 만든 명목이기 때문에 이것을 변통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이미 차자(箚子)를 올려 의논하고, 그밖에 조정의 안팎에 일어나는 안건과 문서를 총괄하여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 공은 정승자리에서 파직되었다.

일찍이 입시(入侍)하여 임금을 모신 자리에 있을 때, 여러 신하들 중에 큰소리로 웃어 체통을 잃은 자[喧笑失儀者]를 나무라 바로잡았고, 민가가 너무 사치스럽고 규모가 커서 법도를 넘은 것들은 헐어버리어 다시는 사치스럽게 짓지 못하도록 하였었다. 그러다가 공께서 다시 나오게 되었을 때는 영의정과 좌의정이 이미 체직이 되어 혼자 정승의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마침 나라 안팎[朝野]에 일이 많아 문서와 보고(報告)가 너무 많이 쌓였으므로 공은 여러 당하관이나 당상관 중에서 사무에 익숙한 자를 가려 뽑아 여러 정사를 나누어 맡기고 자신은 큰틀[大綱]을 총괄하였다. 그런데 그 요점(要點)은 기강[綱紀]을 진작시키며, 요행을 바라는 일을 억누르고, 사치스러운 풍속은 고치도록 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보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당시에 멀쩡히 갠 날에 무지개가 뜬다든지 하는 변고[虹變]가 있었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근년에 알뜰히 골라 추천한 인재가 아직까지 관직에 임용하지 아니 하였으니 마땅히 그들을 발탁하도록 장려하여 급한 일이 생겼을 때 힘을 발휘하도록 하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경비를 절약하여 하늘의 변고에 대한 근심하는 모습을 보이고, 여러 도[諸道]에 명령을 내려 흉년에 백성들을 구제하는 곡식들[賑資]을 잘 운영하게 하고, 수령(守令)들이 곡식을 꿔주는 일을 게을리 하는 폐단을 잘 단속하여 농민들에게 양식이 모자라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하고, 이어서 당론(黨論)의 피해에 대하여 반복하여 경계할 것을 진술하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비답하였다. 여름에 병이 다시 심하여 글을 올려 위급함을 알리고 사직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억지로 나오라고 할 병이 아님을 알고 한 달쯤 경과한 뒤에 체직을 허락하고 판중추부사로 제수하였다.

계사년(숙종40년, 1713년) 봄에, 조정에서 임금의 존호(尊號)를 만들어 올리려고 영의정 이유(李濡)가 공을 찾아와서 그 가부를 묻고 또 존호를 조정에 청한 뒤에도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물었다. 그러자 공이 답하기를 ‘예로부터 이렇게 중요한 의논은 한두 가지 다른 의견이 없을 수 없는데, 저 중국의 육선공(宣公 : 陸贄) 같은 이도 여러 번 천자에게 차자를 올려 살아생전에 존호를 올리는 것이 불가함을 논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임금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의 생각도 실로 그와 같습니다’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임금에게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덕으로써 사람을 사랑하고 임시방편으로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일[姑息]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임금에게 좋은 이름[尊號]를 올려 드리려고 하는 것은 임시방편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임금의 겸손한 덕을 성취시키게 도와주는 것은 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전하(殿下)와 같이 성스러운 덕성과 현철한 명성을 가지고 그 위에 겸손과 수양을 가진 훌륭하심을 더한다면 금상첨화와 같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칭송하는 글자 몇 개를 가지고 존호[徽稱]를 올리는 것은 요(堯) 임금과 같은 어진 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겸손하고 사양하는 미덕에 흠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신하가 되어 임금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도리가 요순(堯舜)과 같이 어진 임금으로 만들지 않고 저 진한(秦漢) 이래로 중간 정도의 황제와 같은 일을 가지고 억지로 끌어들이려고 하여서 되겠습니까? 이 하찮은 늙은 신하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겸손한 덕을 굳게 가지시고 존호를 만드는 것과 같은 형식적인 이름을 사양하신다면 신도 그 영광에 참여하겠습니다. 어찌 칭찬하는 내용에 급급하여 훌륭한 성덕을 이루는 일을 생각지 않아 되겠습니까?”

임금은 이 차자에 대하여 칭찬하는 비답은 내리었지마는 존호를 올리는 일은 결국 중지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 조정에서 존호를 지어 바치겠다는 일에 대한 회의나 정청(庭請)에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임금이 아팠다.

임금의 병은 다음해(갑오년, 숙종41년, 1714년) 여름에 조금 나았는데 그 때 여러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공이 임금을 뵙고[入對] 말씀 드리기를, “지난번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賑政]를 신칙하신 하교나 제주(濟州)에 굶주린 백성들을 돌보게 하신 명령이나 왕궁에 물품을 납품하는 공인(貢人)들을 불러 민정을 물으신 것들은 모두 백성을 걱정하고 애쓰시는 마음이 병상에 있으면서도 해이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옛날 선왕(先王) 때의 신하 이이(李珥)는 선조[宣廟]께서 병환이 나을 때를 기다려 경연 자리에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큰 병을 앓는 중에도 좋은 일을 할 단서를 찾아내어 명령을 내리시므로 인심이 기쁜 마음으로 감복하게 되니 신하나 백성의 바람이 처음 즉위하실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이 이이의 문집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라건대 밝게 살피시고 몸소 시행하십시오.”하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에 공의 병이 다시 발작되자 임금을 그리는 ‘연군시(戀君詩)’ 3편을 짓고 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는데 거기에 ‘만사가 모두 바르게 된다면[万事皆㱕正], 역시 의관을 바로 잡을 수 있겠지[亦可整冠巾]이라’고 하는 시구가 있다. 임금께서 공의 병을 매우 걱정하여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고 약물(藥物)과 어선(御膳 : 임금이 내린 음식)을 내려 주신 일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입시어의(入侍御醫)에게 ‘조 정승의 근래 병세가 다시 어떠하냐?’하고 자주 물었다. 그렇게 4 개월이 지나서 병이 조금 낫자 글을 올려 감사함을 아뢰니 임금의 비답에 이르기를 ‘경의 병은 신의 도움을 받아 낫게 되었으니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하였다.

병신년(숙종42년, 1716년, 공 77세) 가을에 조정에 큰 인사교체[大進退]가 있어서 임금의 전교[傳旨]가 하루에 19 번이나 내린 때도 있었다. 정승인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가례원류家禮源流> 서문에 명재 윤증(明齋尹拯) 공을 나무라고 욕한 일이 있었는데 임금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리어 그 서문을 그대로 올리라고 명령하고, 임진년(숙종38년) 과옥(科獄 : 과거에 관한 옥사)을 다스렸던 3 대신(臺臣 : 사헌부 신하)은 모두 장읍(瘴邑 : 풍토병이 있는 고을)의 수령으로 좌천시켜 내어 보내라고 아울러 명령하였다. 그러자 공이 글을 올려 강력하게 간쟁하기를 ‘임금의 노여움이 거듭되고 엄중한 나무람이 잇달아 내리어, 처리하는 일이 모두 너무 급격하게 되는 것은 안정을 유지하는 성인의 도리에 크게 어긋납니다. 또 윤(증)이나 권(상하)은 모두 그동안 예우(禮遇)를 하던 신하인데 지난번에 서문을 불에 태우라고 한 명령도 실로 화평에 어긋나는 것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그대로 쓰라고 하는 것도 올바르고 떳떳한 일이 못됩니다. 깊이 헤아려 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앞서 말한 두어 신하[臺臣]들을 벌주기 위하여 외직으로 내어보내는 것에 대하여서는 환경이 열악한 시골에 더위를 무릅쓰고 보내었다가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면 임금님의 마음도 안타까운 상처를 받을 것이니 우선 살기 좋은 고을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당시 불량한 사람[無賴人] 신구(申球)가 투서[投䟽]를 하였는데 그 내용은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공의 문집(文集) 중에 두어 가지의 말을 끄집어내어 효종[孝廟]을 무함하고 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 처음에는 그 투서의 내용을 준엄하게 나무라고 배척하였는데 뒤에 김장집(金昌集)의 글[箚]를 보고는 바로 그 문집판본(文集板本)을 헐어 없애버리고 거기에 대하여 다투는 상소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공은 또 글[箚]을 올려 간쟁하기를

‘요즈음 듣자니 좌의정 김창집이 글을 올려 선정신(先正臣) 윤선거의 문집판본을 헐어 버리라고 청하였고 또 조정의 선비나 유생들의 상소도 못 올리도록 금지하라고 청하였는데 임금께서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일일이 다 윤허하셨다고 하니, 지난 날 유신(儒臣)들에게 비답하신 내용과 크게 어긋납니다. 대신(大臣 : 김창집)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글을 올린 일과, 임금께서도 중심을 굳게 가지지 못하시고 그의 생각을 그대로 따른 일에 대하여 신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당초 신구가 상소한 글 중에는 죄가 될 만한 곳 다섯 가지를 뽑았었는데 대신(김창집)은 그 중 두 가지만을 부연(敷衍)시켜서 그 죄를 지적하였는데 마침내 이것이 문집의 판본을 헐어버리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아하! 윤선거는 역적 윤휴[賊䥴]에 대하여 견해가 본래부터 같지 않았으므로 일치하지 않다는 것[刺謬]으로 배척하였었는데 언제 그 의견을 좋게 들었기에 기쁘게 들은 것[喜聞]으로 지목하여 마치 요란스럽게 맞장구를 쳐서 조금도 다른 의견이 없었던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이는 이른바 굳이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면 꼬투리 잡을 말이야 못 찾겠습니까? ‘두거(杜擧)’에 대한 고사를 인용한 것에 대하여 신이 일찍이 그 글을 가져다가 그 내용을 검토해 본 결과 이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당시의 일을 애석히 여기어 서로 이런 일이 없게 하자고 함께 격려 고무하기 위하여 말한 뜻이 글 밖으로 넘쳐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는 의로운 선비에 대하여 감동하고 잘 못 된 세대를 격려하려고 하는 데 충분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잘못한 임금을 나무라기 위하여 그렇게 말하였다고 하는 것은 역시 내용을 잘 헤아려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관중(管仲)이 제환공[桓公]에게 말하기를 ‘바라건대 환공께서는 거(莒)땅에 피신하였던 액운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신(臣)은 또한 사형수가 타는 남거(檻車)에 타고 오던 욕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관중이 노(魯)나라에 있을 때 사형수가 타던 남거에 갇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관중 자신이 받은 욕된 일과 환공이 당한 액운을 들어 서로 잊지 않고 경각심을 가지게 한 것은 오늘 날 볼 때 마치 주제넘은 일 같습니다. 그러나 함께 환난(患難)을 겪고 위험한 지경을 경험한 뒤에 서로 격려하고 분발하자는 도리에 있어서 역시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말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두거(杜擧)의 고사를 끌어들인 말을 가지고 임금을 욕되게 한 망녕된 말이라면 저 옛날 관중(管仲)이 제환공에게 한 말도 환공을 욕한 죄과로 돌리겠습니까? 저 윤선거[宣擧]의 평생 동안 한 말과 행동을 가지고 볼 때는 그 대략이 이 두어 가지 경우에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문자로 써서 조정에 진술한 내용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도 그러하고, 그 밖에 일상 생활의 수작하는 말이나 스스로 내뱉은 말들도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살아계실 때 그 말을 가지고 임금을 모욕하였다고 하여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잘하였다고 칭찬하고 장려하여 윤선거를 꼭 불러들여 벼슬길에 나오게 하려고 하였으니 이는 그의 훌륭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해년(효종10년, 1659년)에 효종께서 서거[賓天]하시고 58년이 지난 지금까지 임금을 무욕(誣辱)하였다고 윤선거를 벌주자는 의논이 있었다는 것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뒷사람들이 그를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여 존경해 오는 것도 그가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신구(申球)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상소한 말이 매우 위험하였지만 연소한 대신[臺閣之臣]들도 그의 말에 대하여 찬동하지 않았는데 임금께서 유신(儒臣 : 윤선거)에 대한 비답으로 신구의 말이 잘못 되었음이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놀란 마음이 조금 가라앉자 오히려 망령된 말을 함부로 한 신구를 벌주지 않은 것을 억울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 또 글을 올려서 잠잠해진 사건에 거센 풍파가 일어나게 되고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에게 죄명이 덮어 씌어져서 문집의 판본을 헐어 없애고 신구를 구제하게 되니 사건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대신(大臣)께서는 조정의 의견이 바로 잡히지 않아 그것을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글을 올렸다고 핑계하였으나 신이 생각할 때는 그가 진정하려고 한 것이 반대로 거세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고 안타깝습니다! 신구 같은 자야 족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가령 윤선거가 살아 있을 때 사람을 상대한다든지 일을 당한 때 말과 문장으로 이와 같은 두어 가지 조관의 말을 하지 않았으면서 남몰래 글로 기록해두었다가 은밀히 전해 주었다면 남의 의심과 비방을 받는 것이 혹 있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고 그 당시 스승이나 제자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충분히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잘못되고 망령된 일이라고 배척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옛사람이 의리(義理)에 어두웠다가 신구 같은 자가 나온 시대에 와서 비로소 밝아졌다는 말입니까?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은 공평한 마음으로 남의 말을 들었고 오늘 날 사람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세태의 변화를 논할 수 있고 시대의 모양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소하는 글까지 받아들이지 말라는 데 이르러서는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됩니다. 설령 대신(大臣)의 글[箚子]이 아주 정당하고 그 견해가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다른 의견들을 널리 듣고 두루 물어본 뒤에 조용히 처분하는 것이 해롭지 않은 것인데 지금 이와 같이 처분한 뒤에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여러 의견을 조정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거듭 대신을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어찌 신만이 애석히 여기겠습니까? 대신(大臣)이 다시 글을 올린 것도 그것을 뉘우쳐 그러한 것입니다. 또한 유생(儒生)을 귀양 보낸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도 원래의 상소문도 올라가기 전에 엄중한 문책부터 먼저 내리시니 이 역시 정당함을 잃은 경솔한 처분이었습니다. 아하! 오늘날 시대의 흐름이 선배(先輩)들을 헐뜯기를 좋아하여 가까운 세대를 헤아려 돌아볼 때 비방을 당하지 않고 완전하게 남은 이가 거의 한 사람도 없습니다. 풍속과 습관이 이로부터 더욱 각박하여져 버리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이것 때문에 더욱 험악해 졌습니다. 이는 실로 당론(黨論)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으로 나라가 망할 징조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님께서는 장차 죽어가는 하찮은 이 신하의 가냘픈 정성을 살피시어 특별히 문집의 판본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을 거두시고 또 소장(䟽章)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금령[禁]을 풀어주시면 국사(國事)에 있어서 매우 다행스럽고 또 각박해져 가는 풍속을 돈독히 해 주신다면 더할 수 없이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조정의 의논은 점점 거세어지고 미촌부자(美村父子 : 尹宣擧와 그 아들 拯)는 마침내 생전에 받았던 관직을 추탈(追奪) 당하였으며 공은 스스로 죄를 짓고 물러나겠다는 상소를 하고 또 봉록[廩祿]을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였으나 임금은 여러 번 창고 관리에게 명하여 봉급을 실어 보내었다. 그리하여 공은 부득이 또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 가을에 문집의 판각을 훼판(毁板)할 때 장돈(章惇)과 유자광[子光]을 들어 사화(士禍)를 비유한 말들이 날마다 문장이나 편지에 올라왔습니다. 대신(大臣)이 일찍이 다만 그 판각만 헐어버리고 그 사람은 벌주지 말라고 하였은즉 장돈과 유자광의 사화에 대한 이야기는 무함이고 날조로 본 것이고 전하(殿下)께서도 무함과 날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신은 그 당시에 그 말씀을 믿고 거세진 의논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사화에 대한 의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 반드시 엄중히 물리칠 것이고 대신도 시기를 맞추어 전하를 알현하고 전에 한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의 처분을 보면 크게 어긋나서 관직을 추탈하라는 명령을 내려, 처벌이 죽어서 묻혀 있는 사람에게까지 미치었습니다. 뜻밖에 전하께서 왕위에 계시는 날 이와 같이 지난 기록에 찾아보기 드문 일이 있게 되니 신은 지난날에 반대하는 말을 진언한 사람으로 지은 죄가 겹겹이 쌓여 감히 입을 열어 지금까지의 명령을 거두시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신이 가진 직위를 사양하고 봉록을 사양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차스럽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을 면하게 해 주소서.”

하자, 임금은 편치 못한 뜻을 보이는 비답을 내리고 다시는 봉록을 수송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가을에 임금이 갑자기 좌의정[左相] 이이명[頤命]을 불러 독대(獨對)하고 또 여러 대신(大臣)들도 불러들였는데 공은 병(病)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비망기[備忘]를 내려 세자(世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였는데 조정의 안팎에서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그 며칠 뒤에 옥당(玉堂 : 홍문관)과 춘방(春坊 : 세자시강원)과 헌대(憲臺 : 사헌부)에서 비로소 경연자리[筵席]에서 범상치 않은 하교가 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헌부에서는 임금의 소명에 응하지 않은 대신들을 논박하였다. 그러자 공께서는 상소하여 소명에 응하지 않은 실수를 밝히고 이어서 생각한 바를 진술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모든 정사를 몸소 다 맡아하시다가 피로가 쌓여 원기가 쇠약하여졌습니다. 나라 안은 그런대로 대강 편안하지만 몸에 드신 병환이 오랜 세월 동안 낫지 않아 그 때문에 오늘날 동궁(東宮)으로 하여금 청정하라는 하교가 내리신 줄 압니다. 그런데 왕세자(王世子)께서는 타고난 기질이 훌륭하시고 나이도 일을 맡기시는데 적합하니 이는 순(舜)이 자식의 위치에서 요(堯)를 아버지의 지위로 모시고 정사를 섭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상께서는 이제부터 몸에 든 병환을 조섭하는데 전심하시고 정사의 만 가지로 힘쓸 일은 걱정하지 않으시게 되니 이는 실로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경사이고 바르고 크고 밝은 일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괴이히 여기는 것은 이와 같이 바르고 크고 밝은 일을 함으로써 종사와 신민의 경사스러운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승지[承宣]나 기록을 하는 기주관[記注之臣]을 물리치시고 독대(獨對)와 같은 정상이 아닌 일을 하시고 이어서 다시 2,3 명의 대신을 불러 들여 비밀스럽게 자문하시었습니다. 이것도 한 번 두 번뿐만 아니라 3 번까지 대면하게 되시니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耳目)으로 볼 때 더욱 의혹이 많아졌습니다. 신은 실로 늙은 나이라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하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옥당에서 글[箚子]이 나오고 대관(臺官)이나 사헌부 및 궁료(宮僚) 들의 상소가 이어지게 되니 비록 그날의 일을 직접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으나 말의 순서를 미루어 보아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말뜻을 따라잡아 보고 놀랍고 근심스러워 눈물이 얼굴을 적시어 자신도 몰래 신음이 튀어 나오고 긴 한숨이 나옴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애닯습니다! 왕세자의 품성은 온후하고 몸가짐이 겸손하고 공경할 줄 알아서 재능을 감추고 과묵하며 한결같이 신중함에 뜻을 두었습니다. 비록 그 처한 곳이나 지위가 실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라도 덕망이 두텁고 사람됨이 신중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지난 날 신이 세자시강원의 빈객(賓客) 자리에 몸을 담고 있어서 글공부[胄筵, 書筵] 자리에 여러 번 가까이 모시고 나아간 일이 있습니다. 이때 덕스러운 모습을 우러러 보고 글을 외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는 집으로 물러나온 뒤에 늘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움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에게 이르기를 ‘저하(邸下)께서 온화하고 어진 모습은 실로 임금으로서의 실덕(實德)을 가지시었다. 이는 종사를 지키어 성취하게 하고 문장을 계승해 나갈 수 있는 그릇이다. 우리 전하께서 이와 같은 아들을 두시어 종사(宗社)의 중책을 맡기시게 되었으니 근심걱정이 없는 것은 어찌 우리 전하뿐이겠는가? 우리나라[東土] 전체의 억조 백성들도 끝없는 복록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법가(法駕 : 왕세자의 수레)를 따라 출입하며 한두 번 우러러 본 사람들의 말은 누구나 똑 같았습니다. 그뿐 아니나 여염[閭巷]의 아녀자들이나 멀고 가까운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왕세자의 성취를 마음속으로 촉망하며, 하늘처럼 떠받들겠다고 목을 길게 뽑고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어질다는 소문을 믿는 바로써 누가 그렇게 하자고 약속한 것이 아님에도 저절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왕세자[正位]로서 호칭을 받은 지도 30년이나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조그마한 실수가 밖에 소문으로 나온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미편한 하교[未安之敎 : 폐세자의 하교]가 내린 것은 무슨 연고이시었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세조로 하여금 청정(聽政)을 허락하시었고 또 미편하였던 하교는 기록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아울러 기왕에 내린 명령을 거두어 주십사고 한 신하들의 청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올린 상소에 대하여 나라를 근심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장려하고 모두 아름다운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즉 오늘에 와서는 다시 말씀 드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드린 말씀은 망령된 발언이라고 이르겠으나, 나라에 충성하고 사랑을 바치는 극진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써 염려가 지나치었음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뜻으로 정승[相臣] 남구만(南九萬)은 갑술년(숙종 20년, 1694년)에 근심하는 말씀을 올렸고, 최석정(崔錫鼎)은 신사년(숙종27년, 1701년)에 나라를 걱정하는 말씀을 올리었는데, 그들의 걱정은 너무 지나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사(宗社)를 이끌어가는 큰 계획에 있어서는 해로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들과 같이 노성(老成)한 사람들은 죽었으나 그들이 한 말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들의 말을 되돌아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그 당시 전하께서 강세구(姜世龜)가 올린 상소 중에 인용한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그를 유배까지 시키는 벌을 내리시었는데 이는 전하의 처사가 지극히 합당하고 중심이 견고하여 종사를 세자에게 영구히 의탁하겠다는 뜻을 가히 우러러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심을 한 번 잃게 되어 많은 사람의 의혹이 불어나게 되고, 그 말은 뒤집어 전파되어 가끔씩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멀고 가까운 곳에 골고루 퍼지니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또한 남의 자식이 된 자[景宗]가 부모[肅宗]로부터 불안한 하교[廢世子]를 듣고 난 뒤에 그 불안한 하교를 만일 부모로부터 분명히 풀어주지 않게 된다면 반드시 슬프고 걱정스럽고 두려워져서 스스로 의욕을 잃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전하로서 측은히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에 대처하는 계획은 전하께서 명령을 내리시어 조정의 안팎에 분명히 알리기를 ‘지난번의 하교는 경솔하고 갑작스러운 데서 나온 것으로 지금은 이미 확실히 깨달았으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시고, 앞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돈독하게 가지시어 마음속에 끼고 있는 혐의를 없애도록 하신다면 신하와 서민들의 의문이 모두 풀릴 것이고 동궁(東宮)의 마음도 편해 질 것입니다. 우리 동방의 억만년 무궁한 복이 여기에 기반을 두게 될 터이니 삼가 성스럽고 총명하신 전하께서는 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어 주소서”

하였다. 이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은 즉시 비망기를 내려 말하기를

“일전에 경연 자리에서 내린 전교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는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궁에게 더욱 분발하고 힘쓰도록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공에게는 비답을 내려 지난 날 대간들의 상소가 지나쳤음을 나무라고 이어서 앞서 내린 비망기의 뜻을 가지고 깨우쳐주었다.

무술년(숙종 44년, 1918년, 79세) 봄에 조정에서 세자가 청정(聽政)하는 일을 종묘에 고하려고[告廟] 하자 어떤 이는 구례(舊例)에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적신(賊臣) 김창집[昌集]은 그만 두자고 하고 공은 의논을 올려 빨리 진행시키자고 하였다. 그리고 또 강빈(姜嬪 : 소헌세자 빈)의 억울한 옥사를 풀어주는 일[伸雪事]에 대하여 의견을 물어오자 공은 말하기를 ‘정신이 혼미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우러러 대답할 말씀은 실로 없사오나 다만 회의(會議)를 하는 날을 당하여 오랫동안 가물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흡족히 내리니 사람의 일이나 하늘의 듯이 서로 부합되어 그런 것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신의 하찮은 생각을 드리는 축하입니다.’하였다.

여름에 병이 더욱 위중하게 되어 6월 그믐날인 정미일에 돌아가셨으니 춘추가 79세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슬퍼하여 조정과 시장을 모두 쉬게 하고 특별히 동원비기(東園秘器)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제사와 장례절차를 구례(舊例)에 따라 하였으며 이어서 3 년 치의 녹봉(祿俸)을 내려 주었다. 윤팔월(閏八月) 병인(丙寅) 일에 영평(永平 : 포천군)에 있는 추곡(楸谷)의 갑자원(甲坐原 : 서향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공은 이마가 넓고 입이 컸으며 눈썹이 길고 수염이 적었으며, 키는 중키이었으나 앉아 있을 때는 마치 바위산 봉우리처럼 우뚝해 보였고, 씩씩한 가운데도 남을 존경하고 온화하여 보지 않은 사람도 그 모습을 가히 짐작할 수 있어서 한번만 보면 공이 위대하고 훌륭한 덕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타고 난 성품이 아름답고 일찍이 숙성한 데다가 가정의 교훈을 받고 스승의 문하에서 인격을 길러 늘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단속하며 행동할 때는 법칙을 따랐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의관을 바로 입고 종일 동안 의젓한 모습을 보이며 평소에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빛을 갑자기 바꾸는 일이 없었다. 성질은 너그럽지만 판단력은 정확하고 엄격했으며 소박하고 인자하여 가슴을 늘 활짝 열고 사람을 대하였으며 어떤 한계도 짓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마음과 믿음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남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 공무에서 물러나 여가가 있으면 늘 서적을 탐독하였고, 앉았을 때는 책상을 마주하고 다닐 때는 책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리고 아무리 병이 들어 누워 있어도 날마다 반드시 세수하는 일과 빗질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으며 엄숙한 자세로 바르게 앉아 게으른 빛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또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여 부모님을 모실 때 온화하고 밝은 표정을 보였으며 작은 절차도 하나하나 조심하여 거행하였다. 아버지인 충정공(忠貞公)이 일찍이 배꼽 밑에 큰 종기가 났는데 의원들은 어쩔 수가 없다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자 공은 몸소 그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마침내 완쾌하게 만들었으니 의원들도 공의 효성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 묘 곁에 토실(土室)을 짓고 시묘(侍墓)하였는데, 아무리 비바람이 불고 추위와 더위가 심하여도 애통해서 부르짖는 일[攀號]을 멈추지 않았다. 늙은 뒤에도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어머니와 아버지[考妣]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기제사(忌祭祀)나 시향(時享) 같은 때에는 종자(宗子)가 가난하여 한평생 동안 대신 행사를 맡아 하였다.

중형(仲兄)인 진사공(進士公)의 병이 위독하자 목부인(睦夫人 : 어머니)이 손가락을 끊으려 하였다. 그러자 공께서 울며 말리고 스스로 넓적다리 살을 베어 피를 내어 흘려 넣었더니 10여 일을 더 연명하고 서거하였다.

공은 이미 현달[貴顯]하였고 나이 또한 70이 넘었는데도, 숙형[叔兄]인 정공(正公)과 이씨(李氏)로 시집간 누님[姊]께서 모두 건강하였으나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맛보도록 하였으며, 나라에서 타는 봉급도 반드시 나누어 주었다. 생일[弧辰]이나 속된 명절[俗節]에는 공의 집에서 음식을 모두 장만하여 때로는 가마를 보내어 맞이하여 오고 때로는 음식을 들고 찾아가서 서로 마주앉아 먹게 되니 화기가 늘 꽉 찼다. 숙형인 정공은 공보다 겨우 3살 위인데도 엄격한 아버지처럼 모시었는데 날마다 직접 가서 안부를 물었고, 앉거나 서거나 할 때는 반드시 스스로 부액(扶掖)하였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옛날 중국 후위(後魏) 사람 양진(楊津) 형제의 우애와 같다고 비유하여 말하였다.

충정공(忠貞公)의 자손으로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사람이 거의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공을 종문노사[宗老門師]로 추앙하였다. 공도 또한 일가(一家)들의 기강[綱紀]을 스스로 만들고 효도와 공경[孝悌]을 가르치는 일을 숭상하고, 경솔하고 게으른 풍습을 경계하며, 놀이나 장난감을 없애어, 아버지인 충정공(忠貞公)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일가들의 서당인 가숙(家塾)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는데 40 세 이하의 사람은 하루에 독서를 몇 판[幾板 : 書算判으로 몇 번]을 읽고, 작문[綴文]을 몇 편씩 하는 등을 정하여 부지런한 정도의 근만[勤慢] 점수를 매기었다. 그리하여 그 점수에서 꼴찌를 한 자는 종아리를 채찍으로 때리었는데 나이가 많아 자식이 있어도 용서해 주지 않았다.

공이 집에 있을 때면 초하루와 보름에는 늘 의관을 정리해 입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고, 자손과 부녀자들은 모두 의관과 머리장식을 바로 잡아 차례로 절을 하고 뵈었다. 이는 당(唐)나라의 학자인 유중령(柳仲郢)의 가규(家規)와 같았으며 여자들이 거처하는 안채 문[閨門]의 안에는 엄숙하기가 마치 조정의 법전을 지키는 것 같았다.

일가 중에 부모를 잃고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나가기 어려운 자는 알뜰히 찾아 도와주고 상을 당하였거나 병이 들었으면 거기에 드는 비용을 힘 닿는 대로 돌보아 주었다. 종자(從子 : 당질)인 성수(星壽)가 가난하여 집이 없었는데 공은 일 년 치 봉급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집을 사가지고 주었는데 친 아들[親子]이 살 곳이 없어도 먼저 돌보지 않았다.

공과 함께 노니는 사람은 다 이름난 선비이었는데 나이가 어린 선비라고 하여 너니 내니 하며, 너무 가까이 하고 농담하지 않으니 마치 밋밋한 정[淡水之淸 : 君子之交淡若水에서 온 말]이 오래 가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죽은 치구를 생각하여 그 친구의 아들을 공의 자식처럼 돌보아 주기도 하였다. 당론(黨論)이 생긴 뒤로 친구의 도리가 먼저 손상되었는데 아주 하찮은 일[絲髮之故]을 가지고도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니 오래도록 우정이 이어간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오도일(吳道一)공이 비방을 받는 데 대하여서는 공께서 그 억울함을 마음속으로 알기 때문에 차라리 오공 대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받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 오공과의 의리를 갑자기 끊지 않았다.

병술안옥(丙戌按獄)에 공은 사사로운 친구라고 하여 바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과 또 한 때 공을 이조판서에 추천하는 일을 빠뜨린 일 때문에 정승인 이여(李畬)가 스스로 멀어진 뒤로 다시는 옛날의 우의[故誼]를 되찾을 수 없어서 공은 늘 한탄하며 이르기를 ‘자삼(子三 : 이여의 자)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조판(漕判)으로 여주강[驪江]을 지날 때는 반드시 찾아뵙도록 하였고 해가 바뀔 때나 명절 때는 편지로 안부를 물었으나 끝내 답장은 받지 못하였다. 거의 10여 년이 지난 뒤에 부음(訃音)이 이르자 공은 마침 손님과 마주하여 풍성한 음식을 나누다가 그 음식상을 빨리 치우게 하고 그대로 앉아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공은 일찍이 이르기를 ‘당론(黨論)이 끼친 폐해는 사람의 마음만 파괴시킬 뿐 아니라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갑술년(숙종 20년, 1694년) 이후 이렇게 서로 상극인 양쪽 편을 반드시 조화시켜 보겠다고 생각하여 한두 명의 동지(同志)와 더불어 조정에서 남달리 애써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공이 물정에 어둡다고 하며 당쟁을 그치지 않았다. 이여(李畬)가 새로 정승으로 승진하였을 때 공은 마침 영릉(英陵)에 있다가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가 보고 나라 일에 동료들 끼리 협심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당시의 사람들은 공의 생각을 살피지도 않고 공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나무랐으며 싸움을 말리는 말까지 듣기를 싫어하였다. 배척하려는 칼날이 맨 먼저 공에게 겨누어졌다. 그러나 임금께서만은 공의 그 마음을 살펴 이해하고 전후로 비답하는 전교[批敎]를 내리시어 늘 공의 공평함을 칭찬하였다.

공이 이조판서[東銓]로 있을 때 조급한 사람은 억누르고 요행을 바라는 자는 막는 것으로 항상 마음을 정하여 놓으니 꼭 적합한 인재를 선발하여야 하는 중요한 벼슬자리[淸要遴簡之地]에 있어서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추천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길러 출세한 사람도 없고 또 추천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도 없었다. 이렇게 공평하기 때문에 병조판서[西銓]로도 또 오래 도록 맡아 있게 되었으나 공은 사사로이 진장(鎭將)이나 절도사[節帥]를 추천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정승의 직책을 맡은 지 1년이 못 되어 질병 때문에 반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직책을 내어 놓고 집에 들어 앉아 있는 지가 10 년이 되었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은 그칠 줄 몰랐다. 때로 임금님께서 보낸 어의[太醫]을 만나면 반드시 임금님의 병환이 어떤가 물어보아 그 의원이 심하지 않고 조금 나아졌다고 하면 기뻐서 잠을 편히 자곤 하였다. 그리고 간혹 조정에서 잘못하는 일이나 실수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근심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병정년 두 번의 상소[丙丁兩箚]를 보면 가히 공의 충성스러운 분노가 극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곧 공께서 선정신[先正 : 윤증]을 옹호하고 간특한 무함을 배척한 일은 후세에 남을 만한 의견이고, 또 춘궁(春宮 : 동궁 곧 경종)을 위한 끊임없는 충성은 마침내 임금의 총명을 열어주어 동궁의 마음을 풀어주라는 비망기[備忘]를 내리게 되어 나라의 근본이 크게 정하여지게 되었고 인심도 안정시키게 되었으니 실로 공께서 올린 한 장의 상소문은 국가사직에 큰 공이 되었다고 이르겠다.

공께서 그 동안에 맡은 직책들은 모두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청요[淸華要腆]의 지위로서 일찍이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지방관인 주부(州府)의 장관을 겸직으로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규례에 의하여 받는 혜택도 조금만 분수에 넘치면 바로 거절하여 물리쳤다. 그리하여 조정에 벼슬한 지 거의 40 년이 되도록 집에는 부자나 귀족의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고 늘 조그마한 마루가 있는 집에 살았는데 이것 역시 자부(子婦)의 친정[親家]에서 지어준 집이었다. 농장에서 들어오는 수십 자루[數十包]와 늙고 쇠약한 종[蒼頭] 2 명을 을 데리고 쓸쓸하게 살기를 마치 빈한한 선비의 집안처럼 살았으며 높은 벼슬에 귀하게 된 뒤에도 땅 한 마지기 종 한 사람도 더 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남쪽 고을[南邑]의 수령이 되었을 때 책 한 부도 발간하지 않았으며 또 일찍이 도감낭청(都監郞廳)으로 차임 되었을 때 지방의 관장(官長)이 돈을 많이 들여 여러 폭 병풍을 만들어 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은 ‘낭청의 집이 좁아서 큰 병풍은 둘러놓을 곳이 없다’라고 하며 끝내 받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선군자(先君子 : 충정공)께서 3 번이나 북경의 사신[三赴燕]으로 다녀오셨는데 거기서 가져 온 물건은 모두 신의주에 있는 국경의 창고[灣賈]에 넣고 오셨다. 이것이 우리 집안의 가법(家法)이다’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종손(從孫)이 북경 사신으로 갈 때 주의시키기를 ‘청나라 돈[虜金]을 가지고 서적(書籍)을 사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간혹 좋은 시절 달뜨는 저녁을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술자리를 만들고 나그네에게는 거문고를 치게 하고 손자들에게는 노래를 부르게 하며 간간이 우스갯소리도 하였다. 어떨 때는 간단한 가마를 타고 조촐한 술통을 들리고는 성 밖의 동산이나 농막에 나가서 휘파람을 불며 노닐다가 돌아오는 일을 잊어버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옛날 동진(東晉) 시대 사영운(謝靈運)이 동산(東山)에 노닐던 운치를 가지기 위함이다. 사물에 대하여 정신을 쏟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은 없고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붓을 잡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특히 왕희지(王羲之)의 정무난정첩[定武帖]의 필법을 본받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글씨는 동방찬(東方贊)에서 글씨의 힘을 얻은 것이 가장 많다’라고 하였는데 동춘(同春 : 宋浚吉)공은 공의 ‘글씨는 마음을 그린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공이 호남어사(湖南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서계(書啓 : 장계)를 올리자 선왕(先王)께서는 ‘이것이 손으로 쓴 것인가’하고 특별히 하문하였다. 공사(公私)의 비문이나 책문[碑冊]이 공의 손으로 쓴 것이 많았으며 공이 쓴 병풍[屛障]이나 편지첩[牘帖]등을, 가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부인은 종성(宗姓)인 전주 이씨로서 목사(牧使) 휘 장영(長英)의 따님이고 판서효민공(判書孝敏公) 경직(景稷)의 손(孫)으로 삼남오녀(三男五女)를 두었는데 장남[男長] 태수(泰壽)는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으로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자는 해수(海壽)인데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고, 계자는 두수(斗壽)인데 지금 순안현령(順安縣令)으로 있다. 딸은 교관(敎官) 이필흥(李必興)과 도사(都事) 권익문(權益文)과 사인(士人) 심경(沈璟)과 서윤(庶尹) 조하장(曺夏章)과 사인(士人) 이시형(李蓍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첨정(僉正 : 태수)은 감사증좌찬성(監司贈左贊成) 심권(沈權)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이남(二男)을 낳았는데 준명(駿命)은 지금 호조좌랑(戶曹正郞)이고, 구명(龜命)은 시직(侍直)이다. 순창군수는 부사(府使) 신확(申瓁)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응명(凝命)을 낳았고, 후취(後娶)로는 병사(兵使) 민용(閔鏞)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일남삼녀(一男三女)를 낳았는데 딸은 진사(進士) 송익휘(宋翼輝)와,이언소(李彦熽)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순안현령은 문천군(文川君) 이관[灌]의 따님에게 장가가서 삼남(三男)을 낳았는데 제명(濟命)과 나머지는 아직 어리고, 후취(後娶)로 사인(士人) 최(崔)씨의 따님을 맞이하였다. 이교관(李敎官 : 필흥)의 계남(繼男 : 들인 양자)은 이헌(彛憲)이고 권도사(權都事 : 익문)의 아들은 보형(保衡),순형(舜衡),일형(一衡)이고, 딸은 조중행(趙重行),유언국(兪彦國)에게 시집갔다. 심(沈 : 경)의 출계남[出男 : 내보낸 양자] 명철(命哲)은 참봉(參奉)이고,명달(命達),명필(命弼)이 있다. 조(曺 : 하장)는 출계남 명협(命協)과 명신(命愼)이 있으며 딸은 최수성(崔守誠)에게 시집갔다. 이(李 : 시형)는 출계남 신제(愼濟)가 있다. 이밖에 내외증손(內外曾孫) 몇사람[若干人]이 더 있다. 정랑(正郞 : 준명)은 공의 시호(諡號 : 易名)를 받기 위하여 나 태억(泰億)에게 기실장[紀宲之狀]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태억은 문장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지마는 한편 생각해 보니 어릴 때부터 공께서 머리를 쓰다듬는 은혜를 입어 공께서 집에 계실 때의 행동과 모습을 깊이 알았다. 그뿐 아니라 내가 벼슬길에 올라[通籍] 조정에 들어간 뒤에도 여러 번 공의 낭료(郞僚 : 부하직원)로 있으며 공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았고 일찍이 공을 따라 경연자리[筵席]에도 모시고 들어가서, 공께서 임금에게 간쟁하는 말씀이 간곡하고 진지하여 마침내는 눈물을 흘리며 울며 호소하는 일도 보았다. 깊은 충성심과 지극한 정성은 위나 아래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충분하여 그 말을 듣고 난 뒤에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다가 병정간(丙丁間)에 올린 글[章箚]을 본즉 사건에 따라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올리되 그래도 충성심이 미치지 못한 듯하였으니, 나라를 위해 자신을 잊어버리는 절의는 실로 옛날 대신(大臣)들의 풍채를 엿볼 수가 있어 또한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군자(君子)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한 말이다.

안타깝다! 이러한 어진 재상을 어디 가서 다시 찾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이글을 쓰는데 있어서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가 없어 삼가 원래의 행장[原狀]을 상고해 본 뒤 몇 가지 빼고 바로잡아 놓았으니, 태상씨(太常氏 : 시호 담당관)는 살피어 채택해 주기를 기다린다.
                      ----끝---

                   *동광공 친필 초서편지와 해설문 2편

                                               작자作者 : 동강東岡 : 조상우趙相愚
                                               번역飜譯 및 탈초脫草 : 족후손族後孫 조면희趙冕熙
*이분의 친필편지와 글씨가 있으나 본 게시판의 환경상 친필 글씨 한편만 올라갔습니다.
나머지를 보려면 http://www.choseo.pe.kr/tt.htm 의 <古典飜譯作品>난에 들어가 '동광공행장'을 참고하십시오.
(一)

*출전(出典) : <근묵槿墨>

이지평의 행차[行史],
경기감사에게 보내는 안부편지

탄핵하는 상소문을 품에 품고 갈 때 이미 이 행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의 성난 위엄 앞에 가까운 고을로 제수를 받았으니 저 팔천리 변경으로 귀양가는 것에 비하여 문지방 안이 아니겠습니까?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게다가 조정에서는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기운이 아직 남아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볼 때 가히 치하할 만합니다.
병으로 문을 굳게 닫고 들어앉아 있으니 나아가 작별할 방법이 없어 얼굴을 마주보는 대신 이 편지를 드립니다.
다만 바라기는 행차 중에 몸을 보중하는 것입니다. 삼가 존께서 살피십시오. 편지 올립니다.

기묘년(숙종25년, 1699년, 공의 60세 때) 12월 23일 상우 배

팔천리 변경[八千之潮陽] : 중국 한퇴지[韓愈]가 영남(嶺南)으로 좌천되어 갈 때 쓴 시에“아침에 임금에게 상소문 한 장 봉해 올렸다가 저녁에 좌천되어 팔천리 변경인 조양으로 귀양 가게 되었네 一封朝奏九重天,夕貶潮陽路八千”한 데서 따온 말.

(二)

*출전出典 : <해동명가필보海東名家筆譜>

*해설

텅 빈 산속에 문을 닫고 들어 앉았으나 벌레소리마저 외로움을 달래 주어 기쁘더니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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