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
종중사진자료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8-10-24 (금) 23:41
추천: 0  조회: 863   
IP: 59.xxx.96
시조 시중공(휘 맹) "묘소"
 

시조 시중공(휘 맹)'묘소' 

- 소재지 :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2리 산53-4 -


1. 유적지 경내
    종   산 : 송능1리 산 1번지 임야 117정2반2무 
    견성암 : 송능1리 대지 및 사찰건물 일체 
    견성암은 고려시대(중엽)에  후손들이 시조님의 봉안과 유적지 보호를 위하여 창건하였다.  
    약사여래불상 : 시중공께서 불공하셨던 불상이라 함.
    암벽상의 묘 위토답 각자 : 영조14년 무오(1738년)각,
    시중공 영정(산령정화) : 1983년10월19일 개사함.
    시중공 동상(산령상) : 1975년8월15일 조성 봉안함.
    시중공 유적비 : 1978년10월21일 제막함.
    종산 조림사업 : 낙엽송과 잣나무를 1973~1974년에 1차로 식수하고 1993~1999년 2차식수로

    조림사업을 완료함.

2.묘소경내
   시중공 종산 : 송능리53-4 산 8반8무
   묘비(묘정우측) : 인조12년 갑술(1634년)설립
   묘전 묘표 : 효종2년 신묘(1651년)입석
   묘하 신도비 : 광무9년 을사(1905년)입석
   풍양재 : 1969년11월8일 낙성
   시중공묘도(계단로)개설 : 1972년4월 설치(회장 정구 자부담)


 

우리 풍양조씨 시조이신 시중공께서는  신라말기에 풍양의 독정리에서 강생하셨고  그 곳에서 은거양덕하시다가 만년에 고려국 태조의 내방으로 제우하시어 고려개국공신이 되시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셨으며 별세 하시어서는 근처인 적성동 인좌원에 안장 되시었다.

가.초휘는 바위<암(嚴) 또는  파회(破回)로 표기>이시였으나  고려태조로 부터   맹(孟)이란 이름을 사 받음.

나,강생지 : 풍양현(현 남양주시진건읍과 진접읍 일대)독정리(현 진건읍 송능1리)임.

다.사적이야기 
    *종중 측 : 석굴-은거양덕-농경-왕건태조 내방-견성암(수양굴)-천마산,산신령 
    *사찰 측 : 약사여래 친견-매탄-왕건태조내방-견성암(수양굴)-천마산,산신령설.

라,묘소 : 적송동(현 송능2리 인좌)

2, 시중공 묘소는 조선왕조 선조10년(1577년)에 선조의 후궁이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입장으로 천장설이 있었고  광해군2년(1612년)에 김씨묘소를  성능이라 추존함과  동시에 능역을 실시함에 즈음하여 천장 될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모면하고 평장을 당하였다가 인조반정(1623년)으로 폐능이 됨에따라 인조8년에 다시 봉분되어 복구되었으니 이를 시중공 묘소의 경변곡절이라 한다.

3. 시중공 묘소의 경변으로 자극을 받은 자손들은 더욱 결속되어 위선사업을 하였고 숙종41년(1715년)에  종회를 결성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많은 위선사업을 하여 왔으며  1950년1월29일자로 화수회(현 대종회)를 결성하여 그 업무를 계승하고 운영하고 있다.
 
========================================================================================

고려국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 묘비명(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

병서 계곡(谿谷) 장유(張維) 撰


고려조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趙公)이야말로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그 묘소가 풍양현(豐壤縣) 적성동(赤城洞) 신향(申向)의 언덕에 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대대로 초부(樵夫)와 목자(牧者)의 출입을 엄금하면서 지켜온 지 어언 6백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10년에 이르러 공빈 김씨(恭嬪金氏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의 생모)가 죽자 공의 식묘(食墓) 뒤쪽 30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호소를 하자, 소경왕이 이르기를,

“공빈의 선조로 말하면 실로 조씨에서 나왔다.[趙之自出]”

하였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지 34년이 지난 광해(光海) 2년에 낳아 준 어미를 추융(追隆)하면서 공빈을 높여 후(后)로 하고 그 묘소를 성릉(成陵)으로 부르게 하는 한편, 근처에 있는 분묘(墳墓)들을 모두 파내어 없애 버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공의 묘소 역시 당연히 그 대상 중에 포함이 되었는데, 당시에 대신이 말하기를,

“오래 된 묘소를 파내어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봉분만 깎아 버려 평지처럼 만들면 충분하다.”

하자, 광해가 그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공의 묘소가 완전히 평지로 변하여 후손들이 성묘할 길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원통한 생각을 품어 온 것이 14년이나 되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금상(今上)이 대위(大位)에 오르셨는데, 그 뒤 8년이 지난 숭정(崇楨) 경오년(1630, 인조 8)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성릉(成陵)을 이미 혁제(革除)한 만큼 신의 선조 모(某)의 묘소에 예전대로 봉분을 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모일에 자손들이 모두 묘소 아래에 모여 글을 지어 고한 뒤 묘역을 열어 보니 광중(壙中)의 네 모퉁이를 완연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에 마침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벽돌로 석계(石階)를 조성하는 등 완전히 옛날 제도대로 복구하였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 이구동성으로 모두 말하기를,

“생각건대 아조(我祖)를 이곳에 모신 지 6백여 년이 지난 때에 봉분을 헐게 되었고 훼손된 지 20년 만에 다시 복구하게 되었다. 대저 6백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까지 후손들이 그 묘소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흔치가 않은 법이요, 게다가 일단 훼손되었다가 곧바로 복구되는 경우로 말하면 더더욱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아조의 덕업(德業)이 성대하여 신명(神明)이 말없는 가운데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비석을 세워 그 자취를 기록함으로써 영원히 전해지도록 해야만 하겠다.”

하고는, 나 역시 외손의 대열에 속한다고 하여 나에게 비명을 쓰도록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원래 이름은 암(巖)으로 풍양에서 살았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은 처음부터 전야(田野)에 은둔하면서 출세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 급기야 고려 태조(太祖)가 일어남에 미쳐 한번 보고는 마음이 계합(契合)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누차 공적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의 호를 받은 뒤 관직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저 고려 태조야말로 영무(英武)한 분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고 그에 맞는 임무를 적절하게 부여하였으므로 현능(賢能)한 인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었다. 그런데 공이 초야에서 솟구쳐 나와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되었으니, 한 세상에 명성을 떨치는 위인(偉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세대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징험할 만한 문적(文籍)도 없어 상세한 사업(事業) 내용이나 생몰년대 및 배필, 자손들을 모두 상고해 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단지 보첩(譜諜)에 기재된 내용을 의거하고 노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참작하여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 다음 명시(銘詩)를 붙이는 바이다. 내외의 여러 후손들 가운데 저명하게 된 이들은 비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빛나는 고려 태조 / 於赫麗祖

제왕 될 부서(符瑞) 쥐고 천명 응할 때 / 握符應期

우리의 시중 어른 / 維時侍中

실로 협찬하였도다 / 實左右之

상주국 품계 성큼 올라 / 勳躋柱國

삼공(三公)의 반열 자리하고 / 位列台司

우뚝 원훈(元勳)되어 / 倬爲元臣

육태사(六太師)와 어깨 겨뤘도다 / 齊六太師

적성동 묘역은 / 赤城之塋

사후의 안식처라 / 降魄攸依

나무들 울창히 우거진 채 / 鬱彼松檟

대대로 출입 금했어라 / 蕘牧遠違

육백여 년 세월 지나 / 歷祀六百

묘소가 훼손되며 / 堂封見夷

봉분마저 없어지자 / 丘壠殘滅

부로들 비탄에 잠겼도다 / 父老傷悲

하늘의 뜻 정해지면 반드시 이기는 법 / 天定必勝

난정(亂政) 뒤엎으며 / 反乎覆而

성군(聖君)이 폐단 개혁함에 / 聖作革僞

후손들 일제히 상소하여 청했다네 / 雲仍齊辭

광중(壙中)을 열어 보니 / 有窅其宮

완연한 네 모퉁이 / 周以阿陲

봉분하고 비 세우고 / 旣封旣樹

훌륭한 모습 되찾았지 / 隆然而巍

아 우리 시중 어른 / 於維侍中

그 덕업 휘황하니 / 德業光輝

유허(遺墟)와 묘소 자리한 곳 / 墟墓所在

백세토록 공경 받아야 하리 / 百代永祗

훼손된 뒤에 복구되어 / 旣隳而復

더더욱 공고해졌는데 / 鞏固益彌

공의 많은 손자들 / 公多孫子

본손(本孫) 지손(支孫)은 물론이요 / 有本有支

나아가 외손까지 / 延及外裔

금관조복(金冠朝服) 착용하고 / 佩服金緋

성묘하고 제(祭) 올리며 / 來展來薦

법도를 어기지 말지어다 / 勿替式時

높은 산 가파른 언덕 / 豐岑巀嶭

강물은 출렁출렁 / 其水瀰瀰

공적 기록한 빗돌 위에 / 伐石紀烈

이 명시 붙이노라 / 陳此銘詩

[주D-001]공빈의 …… 나왔다 : 조씨 가문의 여성이 공빈 김씨의 가문으로 출가했음을 의미한다. 주(周) 나라에서 큰딸을 호공(胡公)에게 출가시키면서 진(陳) 나라의 제후로 봉한 것과 관련, “진 나라는 우리 주 나라에서 나왔다.[則我周之自出]”는 말이 나온 데에서 비롯되었다. 《春秋左傳 襄公 25年》

[주D-002]육태사(六太師) :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태사(太師)를 증직받은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知謙), 유검필(庾黔弼), 최응(崔凝) 등 6인을 가리킨다. 《大東韻府群玉 卷2》

ⓒ 계곡선생집 제13권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 

☐ 시조 조맹의 묘역 ☐



시조조공휘맹의 묘역시중공의 묘역은 생전에 사시던 「독정이」라는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약 2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이곳을 일명 적성골이라고도 한다. 현 지명으로 묘소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5번지 이다.

이 묘소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달리던 한북정맥이 운악산에서 남쪽으로 분맥(分脈)하여 주금산을 세우고, 다시 철마산을 올려 세운 뒤 몸을 틀어 죽 이어진 산줄기에서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인 천마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좌청룡이 급하게 감싸고 우백호가 완만하게 에워 싸여 천연의 성벽을 두른 듯한 조그만 분지의 복판으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힘찬 높고 볼록한 음룡(陰龍)으로 급하게 좌우로 구불구불하며 내려오다 다시 몸을 휘어 흔들듯 잘록하게 학의 목과 같이 부드럽고 깨끗하고 힘차게 결인속기(結咽束氣)하며, 다시 몸을 틀어 멈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혈장(穴藏) 가까이에 몇 번을 몸을 뒤틀어 그 기세를 더욱 떨치는 듯한 대단한 명당 자리라고 풍수지리가들은 감탄하고 있다.

오른편으로는 깊숙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구불구불 골짝을 지나고 들을 건너 왕숙천으로 흘러 들고, 앞으로 멀리 바라보면 수락산과 불암산, 그리고 더 멀게는 삼각산과 도봉산의 그림자들이 한 폭의 그림같이 펼쳐진다.

본래의 봉분 모습은 지면에 가까운 석관형식의 고려시대 사각봉분이 아니었을까 추측되지만 조선 후기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恭嬪)의 묘(墓) 사건으로 인해 봉분이 깎기고 평장(平葬)이 되었다가 인조시대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여러 번의 개축을 통해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활개를 갖춘 원형봉분으로 최근에 12지신상 조각이 양각된 높이 104cm의 호석을 둘렀고 그 위에 70cm 가량 봉분을 얹었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장대석, 향로석 등의 석물을 새로 만들어 놓았으며 봉분 중앙의 새로 만든 묘표는 전면에 2열로 "고려개국공신문하시중 조맹지묘(高麗開國功臣門下侍中趙孟之墓)"라 써 있다.

시조 시중공의 묘비명은 문장이 뛰어나 조선중기 사대가(四大家)로 꼽혔을 뿐 아니라 인조시대 대제학을 지냈으며 평장공파 언국공(彦國公)의 외손이기도 한 계곡 장유(張維)선생께서 찬했으며, 포저공(浦渚公)이 지은 묘비음기에서는 묘소의 복원에 대한 경과 및 시조 이하 세계(世系) 실전에 대한 변(辯)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포저공의 아드님이신 송곡공(松谷公)이 강화유수로 있을 때에 돌을 장만하고 회양공파의 판서공 형(珩) 및 창강공 속(涑)과 합심하여 표석을 세웠다는 송곡공이 지은 묘표음기가 있다.

지금부터 1100여 년전의 천마산(天磨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태종이 풍양에서 사냥하다 환궁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꽤나 숲이 우거지고 깊은 산중이었을 것이다. 당대의 학자이며 문필가인 서거정이 풍양현을 지나다 날이 저물어 역원(驛院)에 머물면서 한수 읊은 서정적인 한시 한편을 소개한다.

잔 들고 누(樓)에 올라 한번 웃으니

수 없는 푸른 산이 뾰족하게 무더기 이루었네

돌아오고자 부질없이 십 년을 귀래시(歸來詩)만 지으니

백발(白髮)은 다정하게 짐짓 재촉 하는구나

[참고문헌] -『송곡집』『동국여지승람』『조남권, 풍양조씨문헌고』『선역도가 풍수지리』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