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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사진자료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8-07-10 (목)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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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 59.xxx.96
화천공(휘 즙) 신도비

 

- 2007년10월14일  양주시광사동 380-2 에서 

같은동  산102-11 로 "화천공 신도비" 이전 후,  모습 - 

 

15세 화천공 즙(花川公 濈)


1568년(선조원년) ~ 1631년(인조9) 64세에 돌아가심.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득화(得和), 호는 화천(花川)이다. 증 이조참판 수원(守元)의 아들이다.

1589년(선조2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24년)에 문과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공의 계부인 수헌(守憲)공이 태인 현감 재직중이여서 중부인 헌납공 수준(守準)과 더불어 복수장 고종후를 도와 병량과 병기를 태인으로 부터 수송조달 하였고 격서를 기초하여 의병모집을 도왔다.

그후 승문원 정자와 저작, 승정원 주서, 한림원 예문관 검열, 세자시강원 세서와 사서, 사간원 정언을 거쳤고

서상관으로 연경을 다녀와서 사헌부 지평, 홍문관 전한, 수선, 부수선, 교리, 부교리와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이후 경상도사, 영천군수, 전주판관을 거처 양양과 영해 두 고을의 원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1613년(광해5년) 페모론 등 정치가 어지러워 야인이 되어 경상도 함창으로 몸을 숨겨오다가 1618년(광해10년) 병, 예조참판으로 발탁되어 8차례의 소명을 받았으나 칭병불복하다가 권간들의 모함으로 불칙 한 화를 당할 뻔 하였으나 한준겸의 구제로 이를모면 하였다.

인조반정후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그 후 성절사로 연경(북경)에 가서 반정 한 뒤의 주청사 일을 잘 마무리하였다.

환조하여 호조참판과 삼척부사를 제수 받아 삼척주민들의 노역을 덜어주고 묵은 세액과 불요불급한 공사를 혁파면제 시키니 읍인들이 동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1623년(인조1) 행호군을 거처 동부승지가 되었고 명종실록의 개수, 편찬에 참여했다.

1627년(인조5년)금나라가 입궐 하였을 때 형조참의로 호가하여 강화에 들어갔으며 김해부사와 강원도관찰사로 승진되었다.

1631년(인조9년)에 의무종훈 으로써 이조참판, 양관제학, 세자좌부빈객을 추증하였다.

1868년(고종5년) 자헌대부,이조판서,양관(홍문관과 예문관)제학 으로 재 추증하였다.

조천록, 연행수창록과 필법 한질이 남아있다.

묘는 양주시광사동 인좌(寅坐)에 배 정부인 밀양박씨(密陽 朴氏)와 합부되어 있으며 묘비, 신도비, 환석, 상석 등이 있고 2자 3녀를 두었다.

후배 증 정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의 묘는 문경시가은함창읍저음산수동 진좌(辰坐)에 있고 묘비, 환석, 상석, 망주석 등이 있고 2자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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