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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06-09 (목)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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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하(趙寧夏)

 

조영하(趙寧夏)

기삼(箕三), 혜인(惠人), 충문(忠文)

[1845(헌종 11)∼1884(고종 21). 조선 말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기삼(箕三), 호는 혜인(惠人). 서울 출신. 현령 병석(秉錫)의 아들로 병기(秉虁)에게 입양되었으며,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의 조카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863년(철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규장각대교를 거쳐,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가 당시 섭정하고 있던 조대비의 총애를 받아 승정원 동부승지에 특별 임명되었다.

1865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고, 1867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개성부유수에 임명되고 1869년 동지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873년 민승호(閔升鎬) 등 민씨일족과 결탁하여 당시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대원군세력 축출에 앞장섰다.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선포되자 금위대장에 발탁되고, 이어 우포도대장·동지삼군부사(同知三軍府事)가 되어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를 겸하였다. 1875년 훈련대장이 되고 1876년 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 1877년 예조판서, 1878년 다시 공조판서를 지내고, 1880년 이조판서·한성부판윤·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상호군으로 통리기무아문당상이 되고, 이듬해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전선어학사당상(典選語學司堂上)·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82년 전권대관(全權大官)으로 일본의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그리고 한미수호조약체결 예비교섭차 인천에 도착한 마건충(馬建忠)과도 접견하였다. 한편, 한영(韓英)·한독(韓獨) 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 뒤 같은 해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지삼군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접견대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군란주동자의 색출과 대원군의 납거를 실현하는 등, 대청외교의 사무를 전담함으로써 국왕과 민씨척족의 신임을 받고 사대보수세력의 수령급 인물이 되었다.

그 해 다시 사은사 겸 진주사(謝恩使兼陳奏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기계·무기 등을 수입하였다. 그리고 관세·외교 담당고문으로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 von)를 초빙, 입국하게 하였고, 청나라와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그 뒤 판리통리기무아문사(辦理統理機務衙門事)·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등을 역임하고, 1883년 독판군국사무(督辦軍國事務)·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갑신정변 때 피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고종기사(高宗紀事)』

『일성록(日省錄)』

『갑신일록(甲申日錄)』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이정숙(李貞淑)

* 시   대 : 조선, 항일기  

* 생몰년 : 1858-1935(철종9-?) 

* 본   관 : 전주(全州)   

* 활동분야 : 여류 교육가  1858(철종 9)∼1935. 여류교육가. 본관은 전주(全州). 경기도 양주출생. 해석(海石)의 둘째딸이다.

16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趙大妃)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와 혼인하였다. 조영하는 1863년 과거에 급제한 뒤 호조판서·훈련대장·병조판서·도통사 등을 지내고 예조판서로 있던 중, 1884년 갑신정변 때 피살되었다.

1875년에는 정부인(貞夫人)에서 정2품 이상의 관직부인에게 주어지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호칭을 받았다.

1906년 1월 엄황귀비(嚴皇貴妃)가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여 총재를 맡았을 때 회장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6월 엄황귀비의 후원을 받아 종로구 수송동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지금의 淑明女子中高等學校)를 설립하고 초대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일이 가정방문을 하여 여성의 신교육을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 양가자녀를 기숙사에 입학시켜 학비와 기숙사비 등을 받지 않고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이후에는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등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여 졸업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 매년 일본의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奈良女子高等師範學校) 등에 진학을 시켰다.

1924년에 학무국으로부터 교육공로표창을 받았으며, 1927년 동아일보사로부터 민간교육공로자로 선정되어 은배(銀杯)를 받았다.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여자교육보급진작의 공로로 다시 학무국으로부터 은배를 받았다.

1935년 임종 직전에 퇴직금 전액을 학교법인 숙명학원(淑明學院)에 장학기금으로 희사하였다. 현재도 제자 및 졸업생들의 협찬으로 이정숙장학회가 계속 운영되고 있다. [*참고문헌 : 淑明七十年史(淑明女子高等學校, 1976).〈鄭忠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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