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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사진자료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05-30 (월)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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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趙寅永)

 

조인영(趙寅永)

1782(정조 6)∼1850(철종 1)

[개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희경(羲卿), 호는 운석(雲石). 상경(尙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엄(曮)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진관(鎭寬)이다. 어머니는 홍익빈(洪益彬)의 딸이다. 국구(國舅) 만영(萬永)의 동생이다.

[생애]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바로 응교에 임명되었다. 그 해 형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도당록(都堂錄)에 선입되었다. 1822년 함경도암행어사로 복명 후 대사헌에 특진하였다. 1826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조참의·대사성·세손좌유선(世孫左諭善)·제학·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0년 세자(뒤에 翼宗으로 추존)가 죽자 세손부(世孫傅)·우부빈객으로서 나이 어린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1834년 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자 바로 이조판서에 기용되고, 이어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훈련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형 만영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39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己亥邪獄)을 주도, 그 해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 斥邪綸音≫을 찬진(撰進)하였다. 1841년(헌종 7) 영의정이 되어 안동 김씨를 압도하고 풍양 조씨의 세도를 확립했으나 1846년 형이 죽자 실세(失勢), 벼슬에서 물러났다. 1849년 철종 즉위 후 민심 수습의 일환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죽었다.

[활동사항]

10여 년 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가 재정의 확보와 민생 문제에 대한 개선책을 자주 건의하였다. 또 이단이 성행하는 것은 정학(正學 : 朱子學)이 천명되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도산·화양 등의 서원에 대한 특전(特典)의 부여와 충신·의사의 포증(褒贈), 경명행수(經明行修)한 선비의 발탁 등을 주장하였다.

김정희(金正喜)와 함께 우리 나라의 금석문(金石文)을 수집, 금석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특히 1816년 성절사(聖節使) 일행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청의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庭)과 교유, 그에게 조선 금석탁본(金石拓本) 수십 종을 기증하였다.

다음 해 귀국하여 김정희와 함께 비봉(碑峰)에 올라, 앞서 발견했던 비가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확인, 68자를 심정(審定)하여 탁본을 작성하고 함께 엄밀한 고증을 거친 다음 이를 ≪해동금석존고 海東金石存攷≫와 함께 다시 유연정에게 보내어,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능했고 1847년 왕명으로 국조보감찬집청(國朝寶鑑纂輯廳)의 총재가 되어 정조·순조의 두 왕 및 문조(文祖 : 翼宗) 대리청정 때의 보감을 편찬하였다. 뒤에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운석유고≫ 20권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순조실록』

『헌종실록』

『철종실록』

『국조방목』

『운석유고(雲石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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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사방비기 僧伽寺訪碑記

  <僧伽寺訪碑記>1817년 가을 秋史 金正喜北漢山 碑峯에 올라 眞興王巡狩碑考證했던 일을 기록한 것

                                                                                                  출처: 雲石遺稿卷之十 記

조인영(趙寅永) 1782(정조6)1850(철종1) 

北漢之南有僧伽寺其上峰曰碑峰自京師雲從街迤北見峰巓一柱兀然如人立俗傳麗僧道詵碑今沒字云歲丙子秋秋史金元春語余曰吾上碑峰碑有殘字實新羅眞興王碑也余聞之狂喜約與之共尋越明年六月八日始踐之工執墨拓具以從由僧伽寺後麓轉石磴數百武得壁刻佛像甚偉夾像而右循嶺脊攀厓腹登焉東自龍門諸山南西至于海可一擧目盡也遂令工搨之細加審定除全缺不可强解餘點畫可辨確然無疑者凡九十有二字如眞興王三字巡狩二字南川二字皆實事可證而與史文經緯者也按三國史眞興王十六年王巡幸北漢山州拓定封疆二十九年廢北漢山州置南川州碑盖紀其蹟也碑文有眞興二字而據智證王本紀新羅諡法始此智證之後歷法興至眞興則眞興時不應預稱其諡似眞興後所立據眞平王二十六年廢南川州還置北漢山州而碑文有南川二字則又似南川廢州之前也眞興王元年在梁武帝大同六年眞平王元年在陳宣帝大建十一年則要之梁陳間刻者又按咸興府之草芳嶺有眞興王北巡碑今佚但拓本在耳字體似楷似隷極古雅與此碑若出一手意同時所刻也歷數羅麗碑目洵爲上乘然輿地勝覽北漢誌諸書並闕之何哉乃鐫名於碑之左側以識月日始秋史尋碑時東籬金時顯偕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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