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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05-26 (목)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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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흡(趙潝)
 

조흡(趙潝)

[개설]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흡여(潝如). 아버지는 교리(敎理) 수익(守翼)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내용]

1623년(인조 1)김류(金鎏)·이귀(李貴) 등이 반정을 꾀함을 알고 이에 호응, 포의(布衣)의 몸으로 이천(伊川)으로 가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

인조가 즉위하자 등극경과(登極慶科)의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했으나, 얼마 후 파과(罷科)되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어 6품관에 초수(超授), 종부시주부가 되었다.

이어 장례원사평·양구현감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고 형조좌랑을 거쳐 청안현감으로 부임, 치적이 현저하여 현민이 송덕비를 세워주었다.

이어 창평현령을 역임하고, 부평도호부사·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쳤다. 1644년에는 특지(特旨)로 공조참의에 발탁되었으며,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1646년 5월 다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그러나 부윤으로 재직 중 술을 폭음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간성군수·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고, 효종 때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다가 1651년(효종 2) 범법자를 다스리지 못하고 탐학한다는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었다.

1654년부터 한성부와 도총부에서 거의 7년 간 몸담았다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국조고실(國朝故實)에 밝았고, 저서로 『풍안군일기(豊安君日記)』가 있다. 시호는 경목(景穆)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조흡 신도비(趙潝 神道碑)

이 비는 1739년(영조 15년) 경기도 양주군 양주읍 광사리에 건립된 조흡신도비(趙潝神道碑)로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고,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조흡(趙潝 : 1591~1661년)의 본관은 풍양이고, 자는 흡여(翕如)이다. 어려서 일찍 부모를 여의고 백형인 조수륜(趙守倫)의 집에서 자랐다. 1623년(인조 1년) 사마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무효가 되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녹훈으로 종부시주부에 나아가서 바로 장예원사평, 양구현감 등이 되었다. 그 후 형조좌랑, 창평현령, 공조참의, 광주목사, 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가 생을 마쳤다.

조흡 신도비(趙潝 神道碑)

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議政府左參賛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都摠管) 경목(景穆)공 행 분충찬모 정사공신 가선대부(奮忠賛謨靖社功臣嘉善大夫)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 풍안군(豊安君) 조(趙)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치사 봉조하(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致仕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증손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우빈객(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右賓客) 상경(尙絅)은 삼가 전집하였으며,

당 유공권(柳公權)의 글씨를 집자하다.

우리나라의 조(趙)씨는 풍양(豊壤)에서 계출한 사람들이 승족이라 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양주의 광암리(廣巖里)에 선산이 있는 사람들이 더욱 낫다. 이조참판 익정(益貞), 진사 팽(彭), 홍문관 전한 종경(宗敬), 의정부 사인 정기(廷機), 홍문관 교리 수익(守翼)은 모두 한 집안에서 벼슬한 사람들이다. 숭정(崇禎) 신축년(현종 2, 1661년) 정월 초하루 아침 풍안군(豊安君)인 흡(潝), 자는 흡여(翕如)이신 분이 돌아가셨는데, 생년인 만력(萬曆) 신묘년(선조 24, 1591년) 12월 22일로 따지면 71세가 되며, 그 해 3월 17일에 합장하였다.

공은 충성스럽고 정성스러웠으며 심후하였다. 용모는 온화하고 준수하며 항상 겸손과 사양으로 스스로 닦아 사람들이 덕인장자(德人長者)로 여겼다. 어려서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보고 “침착하고 드레진 정신이 있으니, 작은 그릇이 아니다.”하였다. 교리공(校理公)도 어진 대부의 모범이 있었다. 그 큰형 풍옥공(風玉公) 수륜(守倫)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함께 지내면서, 지성과 독실한 행동으로, 사우들이 높이 받들었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풍옥(風玉)에게서 길러져 경험과 견문, 지도가 뭇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만력(萬曆) 임자년(광해군 4, 1612년) 풍옥(風玉)공이 화를 입고 돌아가시자, 공은 매우 슬퍼하였다. 그 때 광해군은 정사를 어지럽히고 이륜을 폐하고 막아, 종사는 조만간 전복될 위기에 있었다. 공은 승평(昇平)공 김류(金瑬)와 연평(延平)공 이귀(李貴) 등 여러 공들이 재난을 평정할 뜻이 있음을 알고, 풍옥(風玉)공의 아들 속(涑), 김원량(金元亮), 이후원(李厚源) 등과 함께 추종하였다. 공은 몰래 이천(伊川)에 가서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약속하고 군병을 이끌고 회동키로 하였다. 계해년(인조 1, 1623년) 3월 인조대왕이 즉위하자, 공은 성균관생으로 왕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한 시험인 경과(慶科)에 응시하여 사마양시(司馬兩試 : 사마시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얼마 후 무효가 되어 등용되지 못하였다. 녹훈으로 분충참보정사공신(舊忠賛謨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6품관을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하니, 종부시 주부에서 장예원 사평으로 옮겼다, 양구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피난하였다. 환궁할 때에, 공은 대궐 아래로 달려가 안부 인사를 드린 후, 그대로 상소하여 일을 아뢰었다. 을축년(인조 3, 1625년)에는 공신들이 회맹(會盟)을 하고 벌인 잔치에 참석하였고,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정묘년(인조 5, 1627년)에는 노변(虜變 :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 : 강화도)까지 어가를 호위하여 형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청안현감(淸安縣監)으로 나갔다가, 3년도 못되어 파직되어 돌아왔으나, 읍민들이 돌을 세우고 덕을 기렸다. 의금부 경력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또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임명되어 임기를 마치고 전첨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부평 도호부사(富平 都護府使)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갈려 들어와 상의원-정에 올랐다. 갑신년(인조 22, 1644년) 5월 특지로 공조참의에 임명되었고,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병술년(인조 24, 1646년) 다시 훈맹(勳盟 : 임금과 공신이 짐승을 잡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단결을 맹세하던 일)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들고 나고 하면서 광주부윤, 광주목사, 간성군수(扞城郡守), 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 · 우윤을 지냈고, 갑오년(효종 5, 1654년) 이후 7년 동안은 한성부와 도총부를 떠나지 않았다. 돌아가셨을 때, 조정에서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議政府左參賛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장례물품을 관에서 지급하였다. 유언 때문에, 장례에 석회는 쓰지 않았다. 공은 교리공(校理公)의 아들이요 사인공(舍人公)의 손자이며 전한공(典翰公)의 증손으로, 시조 맹(孟)은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교리공(校理公)의 부인은 변(邊)씨이다.

부인 청해이씨(靑海李氏)는 좌승지 명로(明老)의 따님이다. 아들 백운(伯耘)은 도사요, 중운(仲耘)은 정랑이며, 딸은 참봉 이문행(李文行)에게 출가하였다. 도사의 아들 성보(聖輔)는 문과에 급제한 지평이며, 공보(公輔) · 광보(光輔)는 공부 중이고, 사위는 정자 안후태(安後泰)와 이상휴(李相休)이다. 정랑의 아들은 도보(道輔)와 홍보(弘輔)요, 사위는 이만익(李晚益)이며, 내외 손과 증손은 총 23인이다.

공은 명문 집안의 자손으로 공이 사직에 있다. 또 벼슬길에 나가 일을 즐기니 가는 곳마다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벼슬길에서 이름을 이루고 마땅함을 세우는 것이 순풍이 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청명한 조정에서, 30년 동안을 항상 하급 관료로 맴돌다가 성고(聖考 : 임금의 돌아가신 아버지) 이후에야 품계와 직위가 조금 올랐으나 별로 다스림을 볼 수 없었다. 대개 공은 혼조(昏朝 : 광해군) 때부터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켰고, 훈봉을 주청하였을 때도 놀라기만 하였으며, 내려준 노비도 불문에 부치니, 검소하고 소박하여 수재(秀才)라 부르기에 알맞았다. 가난한 고아를 구휼하는 일에 있어서는 조금도 뒷날로 미루지 않았다. 부인의 누이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시중들 노비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눈앞에서 심부름하는 자를 불러 “네가 가서 잘 섬겨라.”하였다. 일찍이 당을 편액하기를, ‘정좌(正坐)’라 하고, 재(齋)는 ‘용슬(容膝)’이라 하였다. 매양 첫 닭이 울면 일어나 깨끗이 쓸고 조용히 앉아, 주변의 도서를 더러는 훑어보고 더러는 글씨 쓰기를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 당시의 사회의 돌아가는 일이 크게 잘못되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핑계 삼아, 연일 술에 취해 당시 나라가 당한 부끄러움을 분하게 생각하고 한탄하며 눈물지었다. 항상 녹봉이 봉양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한하였다. 때로 가무와 음악을 대하여 갑자기 생각이 나면 번번이 탄식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파해버렸다. 주위 사람들은 왜 그런지를 알지 못하였다. 공은 해서와 행서를 잘 써, 옛날과 지금의 인물과 사실을 한 질로 엮어, 살펴보기에 편하도록 하였다. 관직(官職) · 공부(貢賦) · 성씨(姓氏) · 도읍(都邑) · 연대(年代)까지도 빠짐없이 찬집하여 묻는 자가 있으면 바로 응답하였다. 또 매양 충신이나 의사가 살신성인한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짓지 아니할 때가 없었다. 곽유도(郭有道)는 여관에서 자고 깨면 반드시 직접 물을 뿌리고 비로 쓸어, 사람들이 누가 자고 갔는지를 알고, 진중거(陳仲擧)는 집에 한가히 있는 데도, 뜰에 풀이 무성하였다. 이르기를, “장부가 어찌 방 한 칸의 일에 구구할 수 있으랴?”하였다. 공이 일찍이 “두 사람의 기상이 어찌 이리도 다를까? 그러나 본받을 사람은 유도(有道)이다.”한 것을 보면, 공이 벗을 보는 의미를 알 수 있다. 공은 교유를 즐기지 않았기에 아는 이가 극히 적었다. 오직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만은 자주 어질고 후덕한 사람이라 칭하였는데 논자들이 도리에 맞는 말이라 여겼다. 명(銘)에,

조(趙)씨는 고려 초기에, 나라와 함께 시작했으니

그 계통 멀고 아득하여, 조선에 들어와 더욱 비현했도다.

한평(漢平 : 한평부원군 조연(趙涓))이 태조를 만나, 영예로운 벼슬과 시호 있었으니

전한(典翰)공과 사인(舍人)공에서 교리(校理)공에 이르렀네.

이들은 너무 뛰어나 사람들은 견주지 못할레라.

공은 명문 집안에 타고난 자질도 대단히 뛰어났건만.

한창 왕성히 일할 때에 도리를 따르니, 시대가 어두웠었네.

큰 운을 찬양함에 이르러서도 귀한 것은 사양하고 낮은 것을 취하여

겸손하고 공경히 스스로 지키기를 눈먼 말이 연못에 임한 듯하네.

말하자면 처음 마음은 다만 도리를 바로잡는 것이었을 뿐

귀와 부 따위는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름은 기린각(麒麟閣)에 있어도 몸은 위포(韋布)와 같이 했나니

공명으로 모인 사람들은 종말을 좋게 마친 이 드물었도다.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정신이 수고하니 복록이 따라 붙네

자손은 뜰에 가득하고, 앞뒤로 고관이라.

칠십 희년에도 신기는 아주 깨끗하고 맑으니,

유연히 승화하여, 좋은 명성을 끝까지 보전하네.

내 생각에 그 사람은 스스로 전형이 있어서,

밖으로는 무력했어도 안으로는 왕성했도다.

이익에는 나약한 사람 같았지만 의리에는 물동이 물을 쏟아 부으니,

비록 공경이 못됐을망정 마음만은 화평했으리라.

나는 대강을 갖추려 공의 명으로 삼노라.

숭정(崇禎) 주갑후 51년(영조 15, 1739년) 기미 5월 일 세우다.

-추기-

공의 장자 백운(伯耘)은 벼슬이 호군이고, 차자 중운(仲耘)은 군수이며, 사위 이문행(李文行)은 첨지이다. 백운(伯耘)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감사 성보(聖輔), 직장 공보(公輔), 광보(光輔)요, 사위는 승지 안후태(安後泰), 좌랑 이상휴(李相休)이며, 서자는 회보(會輔)이다. 중운(仲耘)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정인 도보(道輔)와 홍보(弘輔)요, 사위는 이만익(李晚益)이며, 서자는 해보(海輔)이다. 이문행(李文行)의 2녀는 현감 어진척(魚震陟)의 처와 사인 황건(黃鍵)의 처이다. 성보(聖輔)는 아들이 없어 광보(光輔)의 아들 상적(尙迪)으로 뒤를 이었고, 사위는 김도함(金道㴠)이요, 서자는 상만(尙萬)이다. 공보(公輔)의 2남은 도사 상협(尙恊), 참봉 상열(尙悅)이요, 사위는 이구한(李龜漢)이며, 서녀는 황지(黃址)의 처이다. 광보(光輔)는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상적(尙迪)은 도사인데 성보(聖輔)의 양자로 갔고, 다음은 상원(尙遠), 응교 상건(尙健), 현감 상수(尙遂)요, 3녀들은 송호원(宋浩源)의 처, 이연세(李延世)의 처, 심배(沈培)의 처이다.

안후태(安後泰)의 2남 2녀 중, 아들은 서하(瑞夏), 목사 서종(瑞宗)이고, 딸들은 이징즙(李徵楫)의 처 진사 김석번(金錫蕃)의 처이다. 이상휴(李相休)의 3남 3녀 중, 아들은 정혁(廷爀), 참판 정숙(廷熽), 정길(廷吉)이고, 딸은 송순석(宋舜錫)의 처, 황여하(黃汝河)의 처, 서문덕(徐文德)의 처이다. 회보(會輔)의 두 아들은, 만호 상현(尙顯)과 주부 상손(尙遜)이다. 도보(道輔)의 3남 1녀 중, 아들은 판서 상경(尙絅), 첨정 상강(尙綱), 목사 상기(尙紀)이고, 딸은 사인 윤천성(尹天聖)의 처요, 서자는 첨사 상수(尙綏), 첨사 상계(尙繼)이며, 서녀는 이영원(李榮元)의 처, 이석삼(李錫三)의 처이다. 홍보(弘輔)의 2남 1녀 중, 아들은 사평 상순(尙純), 상집(尙緝)이며, 딸은 박만경(朴萬慶)의 처이다. 이만익(李晚益)의 3남 1녀 중, 아들은 현감 필상(必相), 설서 필중(必重), 필명(必明)이며, 딸은 유수성(柳壽星)의 처이다. 해보(海輔)의 2남은 절충 상신(尙紳)과 상채(尙綵)이다.

상적(尙迪)의 1남 1녀 중, 아들은 현감 각(慤)이며, 딸은 정랑 김성로(金省魯)의 처이다. 김도함(金道㴠)의 양자는 현감 성채(聖采)요, 딸은 이광익(李匡翼)의 처이다. 상만(尙萬)의 네 아들은 계(啓), 강(絳), 수(修)와 무과에 급제한 융(隆)이다. 상협(尙恊)의 1남 2녀 중, 아들은 교관 수(脩)이고, 딸은 이징정(李徵鼎)의 처, 부정 이장흠(李長欽)의 처이다. 상열(尙悅)의 3남 5녀 중, 아들은 목(楘), 반(槃), 무(堥)이며, 딸은 이언필(李彥泌)의 처, 김수겸(金壽謙)의 처요, 나머지는 어리다. 이귀한(李龜漢)의 2남 1녀 중, 아들은 진사 조일(朝一)과 진사 조익(朝翊)이다. 상원(尙遠)의 6남 1녀 중, 아들은 선(敾), 돈(敦), 정, 부(敷), 부사 휘(徽), 경(儆)이며, 딸은 이정상(李定祥)의 처이다. 상건(尙健)의 1남 2녀 중, 아들은 유(悠)이고, 딸은 송후상(宋後相)의 처, 김시눌(金時訥)의 처이다. 상수(尙遂)의 1남 5녀 중, 아들은 서(敘)이고, 딸은 송태상(宋台相)의 처, 이극겸(李克謙)의 처, 이현국(李顯國)의 처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상경(尙絅)의 3남은 돈(暾), 생원 엄(曮), 정(晸)이다. 상강(尙綱)의 2남은 봉사 계(棨)와 계(綮)이다. 상기(尙紀)의 3남 1녀 중, 아들은 환(瓊), 준(㻐), 원(瑗)이요, 딸은 어리다. 윤천성(尹天聖)의 두 아들은 완(琬)과 염(琰)이다. 상수(尙綏)의 아들은 비(備)이다. 이영원(李榮元)의 양자는 계운(啓運)이다. 이석삼(李錫三)의 4남은 태원(泰源)과 항원(恒源)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상순(尙純)의 2남 2녀 중, 아들은 진사 징(徵)과 경(敬)이며, 딸은 정사항(鄭思恒)의 처, 윤득흠(尹得欽)의 처이다. 상집(尙緝)의 1녀는 진사 민각(閔珏)의 처이다. 박만경(朴萬慶)의 1남은 부사 시좌(時佐)이다. 상신(尙紳)은 1남을 두었고, 상채(尙綵)도 1남을 두었다. 각(慤)의 3녀는 유의양(柳義養)의 처이고 나머지는 미혼이다. 김성로(金省魯)의 아들은 치온(致溫)이다. 계(啓)의 세 아들은 진수(鎭洙), 진한(鎭漢)과 하나는 어리다. 수(脩)의 4남 1녀 중, 아들은 승수(承洙), 진표(鎭杓), 진권(鎭權), 진추(鎭樞)이며, 딸은 박사상(朴師常)의 처이다.

이징정(李徵鼎)의 세 아들은 덕성(德星), 덕면(德冕), 덕리(德履)이다. 목(楘)은 3남 1녀 중, 아들은 진경(鎭經)이고, 딸은 이사온(李思溫)의 처요, 나머지는 어리다. 돈(敦)은 2남을 두었는데 진장(鎭長)과 하나는 어리다. 휘(徽)는 2남을 두었고, 유(悠)는 1남 1녀 중, 아들은 영령(永齡)이고, 딸은 성주천(成柱天)의 처이다. 이연세(李延世)의 아들은 진극(鎭極)이고, 심배(沈培)는 2남을 두었다. 상현(尙顯)은 2남 1녀를 두었으며, 돈(暾)은 1남을 두었고, 엄(曮)도 1남을 두었으며, 정(晸)도 1남을 두었다. 계(棨)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재(鎭宰), 진령(鎭寧)이요, 딸은 미혼이다. 징(徵)은 1남을 두었다. 정사항(鄭思恒)도 2남을 두었다. 황건(黃鍵)의 4남은 부사 태하(泰河), 판서 구하(龜河), 현령 원하(遠河), 현감 성하(星河)이다. 어진척(魚震陟)의 세 아들은 진사 사하(史夏), 정자 사상(史商), 첨정 사주(史周)이다. 이필상(李必相)의 아들은 이채(彜采)요, 이필중(李必重)의 아들은 직장 이헌(彜憲), 정언 이장(彜章)이다. 내외 손과 증손은 아마 수백 명이 넘을 것이다.

증손 상경(尙絅)이 삼가 기록하다.

有明朝鮮國 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賛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都摠管謚景穆公行奮忠賛謨靖 社功臣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豊安君趙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傳致仕奉 朝賀宋時烈 撰」

曾孫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右賓客尙絅謹篆集唐柳公權 書」

國朝趙氏出豐壤者爲勝譜。其葬在楊州廣巖里者爲尤勝。有吏曹參判益貞,進士彭,弘文館典翰宗敬,議政府舍人廷機,弘文館校理守翼。皆以族而位。崇禎辛丑正月朔朝。豐安君諱潝。字翕如卒。其三月十七日。祔葬焉。公忠愨深厚。容貌和粹。常以謙退自牧。人以爲德人長者。少時申文貞公欽見之曰。凝重而有精神。非小器也。校理公有賢大夫模範。其伯兄風玉公守倫。遊牛溪成先生門下。至性篤行。大爲士友所推。公少孤。鞠養于風玉庭。擩染矯揉。大異衆人。萬曆壬子。風玉公罹禍沒。公旣慟傷之。時光海君政亂。彝倫斁塞。宗國朝夕顚覆。公知金昇平,李延平諸公有靖亂志。遂與風玉公之胤涑,金公元亮,李公厚源協同從之。公密往伊川。約防禦使李重老使以兵會。癸亥三月。仁祖大王卽位。公以諸生。試登極慶科。中司馬兩試。未幾罷其科不用。錄勳賜奮忠贊謨靖社之號。超授六品官。自宗簿主簿。移掌隷院司評。除楊口縣監。李适叛。上去邠回駕。公奔問闕下。仍上疏言事。乙丑。參會盟宴。翌年。解官歸。丁卯。有虜警。扈駕江都。由刑曹佐郞。爲淸安縣監。未三年罷歸。邑人立石頌德。除義禁府經歷。不仕。又爲昌平縣令。秩滿。入爲典籤。旋拜富平都護府使。未幾遞入。陞尙衣院正。甲申五月。以特旨擢授工曹參議。出爲驪州牧使。以病解歸。丙戌。又參勳盟。陞嘉善封豐安君。自是出入爲廣州府尹,光州牧使,杆城郡守,都摠府副摠管,漢城府左右尹。自甲午以後凡七年。不離漢城都摠二府以卒。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遣官致祭。其喪物官給之。遺命葬不用石灰。公校理公之子。舍人公之孫。典翰公之曾孫。其始祖孟。官至侍中。校理公配曰邊氏。夫人靑海李氏。贈左承旨明老女。男伯耘都事。仲耘佐郞。女適參奉李文行。都事生聖輔。文科持平。公輔,光輔業儒。女壻正字安後泰。次李相休。佐郞生道輔,弘輔。女壻李萬益。內外孫曾摠二十三人。公以名家子。功在社稷。又興官耆事。隨有聲績。其於宦成名立。宜如順風而呼。而淸朝三十年。顧常低徊下僚。聖考以後。秩位稍陞。而亦宂不見治。蓋公自在昏朝。杜門自守。及啓勳封。處之若驚。恩賜臧獲。置之不問。寒儉淡素。幾於秀才之呼。至其周卹貧孤。則一毫不爲後日留也。聞夫人妹新嫁無侍婢。卽呼眼前使喚者曰。汝往謹事之。嘗扁其堂曰正坐。齋曰容膝。每鷄鳴而起。淨掃淸坐。左右圖書。或佔畢或書字。未嘗懈也。晩年時事大謬。則託於沈冥。或連日酩酊。有時慨念國恥。嘆咤流涕。常以祿不逮養爲恨。或値歌舞樂事。而忽然興懷。則輒噓欷釀淚而罷。傍人莫知其意也。公善楷行。手寫古今人物事實。編爲一帙。以便考覽。以至官職貢賦姓氏都邑年代。無不纂集。有問者。應之如響。每讀忠臣義士殺身成仁處。未嘗不流涕也。郭有道行宿逆旅。躬輒灑掃。人必知其昨宿也。陳仲擧間處一室。庭草蕪穢。曰安事一室。公嘗曰。兩人氣象。何如是不同也。然所尙則有道也。其尙友之微意。亦可知也。公不喜交游。故知者絶少。惟鄭畸翁弘溟亟稱爲仁厚長者。論者以爲知言云。銘曰。

趙於麗初。與國偕始。厥緖遙遙。入我尤丕。漢平遭逢。榮有爵諡。典翰舍人。以及校理。是謂峻望。人莫與比。公乃稱家。天賦卓異。方當壯歲。遵養時晦。及贊弘運。辭尊取卑。謙謙自持。瞎馬臨池。蓋曰初心。只正倫彝。惟貴與富。匪我之思。名在麒麟。身如布韋。功名之會。人鮮克終。豈弟神勞。福祿來從。蘭玉盈庭。前後紳纓。七十稀年。神氣精明。悠然乘化。終保令名。我想其人。自有典刑。其外粥粥。內實亭亭。懦夫於利。於義建瓴。雖不公卿。克和且平。我撮其槩。以爲公銘。

崇禎周甲後五十一年己未五月 日立」

-追記 -

公長子伯耘官止護軍次子仲耘官止郡守女婿李文行官止僉知伯耘有三子二女聖輔監司公輔直長光輔女婿安後泰承旨李」

相休佐郞庶子會輔仲耘有二子一女道輔都正弘輔女婿李晚益庶子海輔李文行二女縣監魚震陟妻士人黃鍵妻聖輔無子取」

光輔子尙迪爲后女婿金道㴠庶子尙萬公輔二子尙恊都事尙悅參奉女婿李龜漢庶女黃址妻光輔四子三女尙迪都事出繼尙」

遠尙健應敎尙遂縣監宋浩源妻李延世妻沈培妻安後泰二子二女瑞夏瑞宗牧使李徵楫妻進士金錫蕃妻李相休三子三女廷」

爀廷熽參判廷吉宋舜錫妻黃汝河妻徐文德妻會輔二子尙顯萬戶尙遜主簿道輔三子一女尙絅判書尙綱僉正尙紀牧使士人」

尹天聖妻庶子尙綏僉使尙繼庶女李榮元妻李錫三妻弘輔二子一女尙純司評尙緝朴萬慶妻李晚益三子一女必相縣監必重」

說書必明柳壽星妻海輔二子尙紳折衝尙綵尙迪一子一女慤縣監正郞金省魯妻金道㴠繼子聖采縣監女李匡翼妻尙萬四子」

啓絳修武科隆尙恊一子二女脩敎官李徵鼎妻副正李長欽妻尙悅三子二女楘槃堥李彥泌妻金壽謙妻李龜漢二子二女朝一」

進士朝翊尙遠六子一女敾敦侹敷徽府使儆李定祥妻尙健一子二女悠宋後相妻金時訥妻尙遂一子五女敘宋台相妻李克謙」

妻李顯國妻尙絅三子暾曮生員晸尙綱二子棨奉事綮尙紀三子一女瓊㻐瑗尹天聖二子琬琰尙綏一子備李榮元繼子啓運李」

錫三四子泰源恒源尙純二子二女徵進士敬鄭思恒妻尹得欽妻尙緝一女進士閔珏妻朴萬慶一子時佐府使尙紳一子尙綵一」

子慤三女柳義養妻餘未字金省魯子致溫啓三子鎭洙鎭漢脩四子一女承洙鎭杓鎭權鎭樞朴師常妻李徵鼎三子德星德冕德」

履楘三子一女鎭經李思溫妻敦二子鎭長徽二子悠一子一女永齡成柱天妻李延世子鎭極沈培二子尙顯二子一女格暾一子」

曮一子晸一子棨二子二女鎭宰鎭寧徵一子鄭思恒二子黃鍵子泰河府使龜河判書遠河縣令星河縣監魚震陟子史夏進士史」

商正字史周僉正李必相子彜采李必重子彜憲直長彜章正言內外孫曾殆過數百人 曾孫尙絅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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