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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중사진자료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16-05-25 (수)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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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돈(趙暾)

   

조돈(趙暾) 영정

[1716(숙종 42)-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서(光瑞), 호는 죽석(竹石). 중운(仲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보(道輔)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경(尙絅)이다. 어머니는 이정태(李廷泰)의 딸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1740년(영조 16)에 유학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정언(正言)을 거쳐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오르고, 부수찬(副修撰)·수찬·교리(校理)·헌납(獻納)·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1750년에 북평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정배되었다가 부응교·사간·책례도감낭청(冊禮都監郎廳)·보덕·승지·대사간을 거쳤다.

1756년 충청도관찰사로서 도내 수령들에게 그 지역에 긴급히 요구되는 진휼 업무가 많아고 과거를 치를 여가를 주지 않아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참의·좌윤·내국부제조(內局副提調)·경기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때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서 10년 만에 행하는 상참(常參 : 의정대신·중신·시종신이 편전에 나아가 왕에게 국무를 아뢰는 일)에 제신(諸臣)은 긴급히 참여해야 하나 이목(耳目)의 관언은 겨우 한 사람만 참여하고, 상참에 나온 관원은 사무에 중요한 보고를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되었다.

1761년에 순흥부사에 특보(特補)되고 개성유수를 역임했는데, 공무를 처리하는 데 확실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침착하고 현명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한성우윤·함경감사·대사헌을 거쳐 1764년에 경과(慶科)에 응시한 자로서 시험에 응하지 않은 죄로 제학(提學) 윤급(尹汲)과 함께 호역(湖驛)에 유배되고, 그 뒤 이천부사로서 좌천되었다.

경상감사를 거쳐 이조판서로서 유가를 청했으나 자중할 것을 명받은 뒤에 귀향 길을 찾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제천현에 부처(付處)되었다. 그 뒤 판윤을 거쳐 1771년에 나이가 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걸해(乞骸 : 나이 많은 관료가 벼슬길에서 물러날 것을 아룀.)를 청하자 영조가 비로소 봉조하(奉朝賀)를 제수하고 ‘경심금수여의창연(卿心今遂予意悵然 : 경의 마음은 지금 홀가분 할 지는 모르나 짐의 뜻은 실망스럽구나)’이라는 8자를 친히 지어 하사함으로써 벼슬길에 물러날 것을 허락받고 양주 천죽리(川竹里)에 퇴거하였다.

사후에 정조는 특별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증직하고 아들 중에서 관직에 있는 자는 탈상을 기다려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조저의 기념(記念)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두 동생 엄(曮)과 정(0x9759)도 모두 현달(縣達)하였다. 1799년 숙헌(肅憲)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영조실록』

『정조실록』

『국조방목』

『몽오집(夢梧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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