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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05-19 (목)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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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관(趙鎭寬)

 

조진관(趙鎭寬) '영정'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유숙(裕叔), 호는 가정(柯汀). 증조할아버지는 돈령부 도정 조도보(趙道輔)이고,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조상경(趙尙絅)이며, 아버지는 역시 이조 판서를 지낸 조엄(趙曮)이다. 어머니는 홍현보(洪鉉輔)의 딸인 풍산 홍씨(豊山洪氏)이고, 부인은 홍익빈(洪益彬)의 딸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인 조만영(趙萬永)의 딸이 익종 비인 신정 왕후(神貞王后)이다.


조진관(趙鎭寬)[1739~1808]은 1762년(영조 38)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771년(영조 47) 의금부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775년(영조 52) 세자익위사 시직이 되었는데, 이때 영조가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구현시(求賢試)를 실시하였으나 몇 번의 시사(試士)에도 마땅한 인재가 없자 음서(蔭敍)[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공로로 관직에 진출함] 출신자 중에서 직접 가려 조진관을 선발하였다. 이후 내직, 외직을 두루 거친 뒤 동부승지에 특별히 발탁되었고, 곧 이어 광주 부윤에 제수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아버지 조엄이 당시 권력을 좌우하던 홍국영(洪國榮)과 갈등을 보이자 이를 변명하기 위해 신문고를 치거나 칼로 몸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 의금부에 갇히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 조엄이 김해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홍국영이 권력을 잃은 뒤 아버지에게 직첩(職牒)이 환급되었고,
조진관에게도 군직(軍職)이 제수되었다가 곧이어 돈령부 도정에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종2품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면서 한성부 우윤과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이때
조진관은 이전에 있었던 일이 억울하다며 몇 차례 재조사를 요구하였고, 정조가 특별히 어사 이사황(李相璜)에게 조사하도록 하였다. 1794년(정조 18) 한성부 우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 형조와 병조의 참판, 대사간을 지냈고, 1795년(정조 19)에는 형조 참판과 동지춘추관사를 거쳐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을 맞아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올릴 때 승지로 공을 세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급하였다. 이후 도승지를 지낸 뒤 1796년(정조 20)에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서는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지역 인재를 추천하였다.

1797년(정조 21) 경상도 관찰사와 전라도 관찰사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하였다. 이어 1798년(정조 29) 지춘추관사와 도총부 도총관, 지의금부사,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뒤 호조판서에 제수되었고, 1800년(정조 24)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 당상으로 차출되었고, 이어 이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과 주교사 당상을 역임하였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급되었다.

1801년(순조 1) 지돈령부사를 거쳐 형조 판서와 의정부 우참찬을 역임하였고,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서는
정조가 친위 부대로 창설한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 1802년(순조 2) 호조 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이어 숭정대부로 승급하였다. 1803년(순조 3)에는 이조판서,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비롯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1804년(순조 4)에 의정부 좌참찬과 홍문관 제학,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호조판서 재직 시 정조의 능인 건릉(健陵)의 보수에 공이 있어 숭록대부로 승급하였고, 1805년(순조 5)에는 정순 왕후(貞純王后) 옥책문(玉冊文)을 찬술해서 올린 공으로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다. 1808년(순조 8) 신하로서는 영광인 기로소(耆老所)에 입소하였다가 같은 해 윤5월 15일 사망하였다.


조진관은 평소 『주역(周易)』 연구에 주력하여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였다고 하며, 『역문(易問)』을 저술하기도 할 정도로 평생을 주역 연구에 매달렸다. 『역문』은 『주역』의 각종 문제를 도합 18개 항목으로 분류, 여러 모로 논증하고 토의한 글로, 아들 조인영(趙寅永)이 쓴 발문(跋文)에 따르면 당대까지 역학(易學)을 말하는 학자들이 흔히 언급하지 아니한 부분을 많이 해명해 놓은 글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천문과 율(律)·수(數)에도 해박하였으며, 음악에도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 『가정유고(柯汀遺稿)』가 있다. 『가정유고』는 10권 5책으로, 권1과 권2는 시(詩)가 수록되었고, 권3은 「사한성우윤소(辭漢城右尹疏)」 등 소(疏) 18편, 권4는 상소와 계(啓), 의(議) 등이 수록되었다. 권5는 개성 숭절사에 모셔진
임진왜란 때의 삼충위(三忠位)에 관한 기록의 「삼충록서(三忠錄序)」와 같은 서(序)나 기(記)·사(辭) 등 8종의 문장을 수록하였다. 권6부터 권7까지는 인물에 대한 묘표(墓表)와 묘갈문(墓碣文), 신도비명(神道碑銘), 시장(諡狀), 전(傳) 등을 수록하였고, 권9와 권10은 『역문』으로 구성되었다.


묘는 사망 직후에는 아버지 묘가 있는 강원도 원주에 있었으나, 후에 이장해서 영평현 광석리로 옮겼다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로 다시 옮겼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조진관 신도비(趙鎭寬神道碑)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리)   

이 비는 1850년(철종 1년) 경기도 포천에 건립된 조진관신도비(趙鎭寬神道碑)로 중표질(中表姪)인 윤정현(尹定鉉)이 비문을 지었고, 손녀사위인 김학성(金學性)이 글씨를 썼으며, 척종손(戚從孫)인 홍재철(洪在喆)이 전액을 하였다.  

(篆額) 吏曹判書贈領議政諡孝文趙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行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五」

衛都摠府都摠管諡孝文趙公神道碑銘幷序」

 中表姪崇政大夫行兵曹判書兼知 經筵義禁府春秋館事弘文館提學知 實錄事尹定鉉撰」

 孫女婿正憲大夫廣州府留守兼南漢守禦使 奎章閣檢校提學知 實錄事金學性書」

 戚從孫正憲大夫刑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洪在喆篆」 

領中樞府事雲石先生。進定鉉而敎之曰。先大夫孝文公捐背四十有一年。幽堂有誌。墓前有表。傳家有譜。請謚有狀。而隧道之顯刻闕焉。子幼及吾先人。詳吾先故。庸是以爲屬。惟孝文公大節。非定鉉敢銘。不敢當。先生屬愈勤。終不獲辭。謹按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謚孝文趙公。諱鎭寬字裕叔號柯汀。漢陽府豊壤縣人。始祖孟。佐高麗太祖開國。官門下侍中。入本朝顯者吏曹參判漢平君恭肅公諱益貞。世有聞人。七傳而諱道輔敦寧府都正贈左贊成。於公爲曾祖。祖吏曹判書贈領議政景獻公諱尙絅。考吏曹判書贈左贊成文翼公諱曮。妣貞敬夫人豊山洪氏。禮曹判書貞獻公鉉輔之女。英宗壬午中生員進士兩試。辛卯筮仕義禁府都事不就。乙未拜翊衛司侍直。上夢良弼。設求賢科。試士至再。卒無當上意者。復親策蔭仕人。公對居第一。上乃喜曰趙曮有子。賜祭景獻公。用傅巖故事。將位以不次。歷試內外。特授同副承旨。旋除廣州府尹。明年丙申。正宗嗣服。洪國榮方用事。素忌文翼公嚴正。縱言者搆銓注西藩兩案。欲甘心焉。公撾申聞皷。條辨被誣狀。上敎以子弟稱寃非異事。令行査本道。公就囚義禁府。判堂蔡濟恭禁絶家信。一夜有吏卒妄傳獄中沸沸言。文翼公後命已下。公自念欲鳴父寃。乃反至此。無面目立於世。引佩刀自裁。絶久而甦。上聞之亟稱孝哉孝哉。卽出之獄。未幾特提公自刎事。命文翼公减律移配。丁酉文翼公卒於金海謫所。奉櫬歸鄕廬。痛毁踰節。國榮敗。命追給文翼公職牒。公亦付軍職。戊申上諭文翼公居銓見欺。除公敦寧府都正。公感激一謝而退。庚戌上言于蹕路乞更査。命詢大臣無異議。蔡濟恭居政府不覆奏。公席藁其門懇乞而終不聽。癸丑上推恩英廟舊臣。陞嘉善。拜漢城府右尹,都緫府副緫管。疏言年前哀訴。爲有司所靳持。力辭遞。甲寅春。又上言。乃遣御史李相璜按簿稽覈案。始得正。於是相臣法官。一辭稱可寃。上洞諭而昭雪之。盖公上言者三。陳疏者一。胥命者亦久。凡十九年而事始白焉。夫死故能緩親之禍。死而復生。故又能伸親之寃。此天相其孝。而公則知爲子盡分而已。嘉靖間。循吏王忬爲嚴嵩所中。議大辟。子世貞伏斧鑕上書訴寃。與公父子事相類。世貞不能得之於明皇帝者。公乃得之於我正宗。誠日月之明。度越百王矣。然非公之孝出古人上遠甚。何以有此。是年除右尹,同義禁,刑曹兵曹參判,大司諫,備邊司堂上。承命編撰惠政年表。有宰臣請改小學舊注。公奏非醇儒不宜增刪。上嘉納。乙卯在諫院。爭執赦令坐竄。以親年贖。叙拜禮曹參判同春秋。以惠慶宮周甲進箋時承旨。陞嘉義。上疏乞退。上留其疏。召公敎曰卒先卿未卒之事。卽卿之責。可遽退乎。又於賓筵諭其不當退累數百言。遂不敢復請。進都承旨。丙辰耽羅有泛舟之役。差羅里舖勾管堂上。出爲開城留守。詢民情察地形。請割長湍之沙川以西。金川之大小南面以屬之。薦人士之才行者甄用。革儒債謬例。府人繪像妥生祠。丁巳春夏。連拜慶尙全羅二道觀察使。以私義不可赴藩臬。終不膺。啣命祭金將軍應河廟。還請㫌其閭從之。差有司堂上兼大司成。試士取文體雅馴。不得者嗾憲臺疏詆之。公對卞乞解。以親受馳馬臺碑文時承旨。陞資憲。戊午拜知春秋,都緫管,知義禁,工曹刑曹判書。審理京外獄多平反。時議鑄重錢。公議曰錢貨上之所造。物産民之所出。物産有限。而錢貨日增。則百用翔貴。民受其病。顧今人心漸淆。又創奇貨。非所以示朴。事遂寢。薦拜戶曹判書。守公格剔奸弊。庚申春。薦拜兵曹判書。政先淹滯。有以親老十年不求仕者。首擧之。差宣惠堂上。上諭卿於地部。典守甚勤。惠局亦如是做去。六月正宗禮陟。差國葬堂上兼同經筵。薦拜吏曹判書。卽日出城陳懇曰。臣於此有至寃深恨。在昔臣家所遭藩務猶影子。銓地爲根柢。此一步卽臣沒齒矢心之所。不如是。無以㬥素衷於來後。竟獲遞。拜大司憲舟橋堂上。以敦匠陞正憲。兼知經筵實錄事。特除戶曹判書。辛酉拜知敦寧。復判刑曹。按邪獄輒溫言平問。喩以倫常。執迷不變。始乃抵法。歎曰彼不自知其非。甘就刀鋸。吾所以若是者。庶或有自覺而爲平民。由是悔悟者亦多。移右參贊。復判兵曹。以壯勇營事坐罷。壬戌拜判尹。旋移戶曹。時有宮房無土。免稅八百結劃送之令。據法論止之。又請軍資監郞官依太倉例自辟久任。兼藝文舘提學。以祔廟尊崇兩都監敦匠。陞崇政。癸亥兼同成均。復判吏曹。上疏陳三十年弸結于中者。一朝而毁之。將何以見先臣於地下。上優報許之。移判戶曹。旋判兵曹。兼判義禁。復管惠局。命造社壇樂器。時天寒艱於採玉。引英廟甲子庭縣改造退期例請待春。又請文廟樂移用皇壇例。以風雲壇樂權宜進用。上可之。甲子拜左參贊,弘文舘提學,禮曹判書。移判戶曹。以健陵修改陞崇祿。董建仁政殿。旣成受錫馬之典。乙丑撰進貞純王后玉冊文。陞輔國。公久掌邦賦。媢嫉者媒蘖于時相啓罷之。公累疏解惠局。復判戶曹。以母年九十。引宋公欽,李公賢輔故事乞歸養。批以便養除華城留守。捐捧三千。築官屯水閘。幕僚請記其事。公靳之曰身將隱。焉用文。丁卯復申終養之請蒙許。奉大夫人怡愉晨夕。拜判敦寧辭不出。此公歷官行事。而前後提調宗廟,社稷,景慕宮,壯勇營,內醫,尙衣,掌樂,承文,司譯諸院。觀象,典醫,繕工諸監。司圃,內贍二寺。掌苑署,典設司焉。戊辰入耆社。閏五月十五日考終。享年七十。訃聞撤朝市吊祭。太常議謚曰孝文。今上初。用男忠敬公國舅恩贈領議政。初窆原州文翼公墓右。移葬永平廣石里巽坐原。夫人祔焉。公自幼端重雅飭。世父肅憲公性峻少許可。於公言。每稱善而從之。因駙馬揀入闕。內竪引羣兒見淑媛。公曰何可就後宮。召過眞殿則四拜。英廟聞而大奇之。十五六時。以彌甥謁相國兪公。座有京畿觀察使。兪公與語諺飜裨史。客去公進曰公差矣。何一言不及於民政爲。兪公語人曰向趙生駮我。然其器必遠到。時公內外昆弟多早敭。公獨下帷讀書。隣里罕覯其面。然聲譽闇然日章。一主司致意拔擢。公赴試他所以遠嫌。儉約自持。冠佩不飾。箱篋無鐍。文翼公赴西藩。都門外送者甚盛。有見公麤袍羸驂雨衣掛鞍者。聞丙申禍作。歎曰是公儉德。豈枉死者耶。一貂帽十五年不改曰。老臣受先王賜。惟弊此以沒身耳。三任中權。八掌金糓。田宅無加。書史蕭然。入其室。瓦盆土爐。丙夜點油燈自照。每誦趙文子生不交利。死不屬其子之語曰。吾於此。庶無愧矣。先誣未雪。不接浿人。一物之微。産於浿者。亦不以近。文翼公喪。斂用士禮爲至恨。遺令母以錦緞附於身。或言先公䂓度恢廓。公太謙抑。不欲自任以世道何哉。公謝曰吾於先子。無能爲役。且自量疎迂。不敢有當世念耳。處事接物。平恕樂易。其或當大義。守正不撓。庚申廷議沈鏔罪。沈煥之欲傅生。公引李可灼事爭之曰。此賊若保首領。相公不免千古罪人。硏精易經。至忘寢食。著易問一書。自謂平生工夫在此。星曆律數。靡不究解。嘗聞肄樂曰林鐘之音。散而不中律。審之鐘果微缺。老樂師皆驚。弱冠侍文翼公於嶺藩。方創漕倉。委輸轉運之費。毛繁絲棼。營胥幕賓不能計。公籌之一夕而畢。爲文本原經史。啣華佩實。簡不至澁。紆不至蔓。嘗以句棘字艱非正軌。取法於廬陵。詩尙淸健。有遺藳幾卷。定鉉先人。於公中表親。臭味相近。嘗事之如兄。兒時見公頻過吾第。尙記其眉宇淸粹。言笑簡當。陽休山立。金精玉潤。雖童孩無省識。自不覺肅然起敬。先人在謫中有言曰。今世作家。當推柯亭爲第一。人無知者。吾恨未及薦代文衡。此可以徵公之文章歟。配贈貞敬夫人洪氏。籍南陽。府使益彬女。先公十年己未卒。壽六十一。正廟敎筵臣曰聞戶判夫人甚有婦德。重臣宜其悼之。擧三男。萬永領敦寧府事豊恩府院君謚忠敬。原永牧使贈參判。出后季父。寅永領中樞府事。四女兵使李復淵,庶尹金炳文,郡守尹慶烈,士人李在文。忠敬子秉龜吏曹判書謚文肅。秉夔前承旨。女長卽我孝裕獻聖王大妃。寔誕我主上殿下。次李寅卨進士。次兪致善應敎。次金奭鉉進士。牧使子秉駿今參判。三女李埈進士,元世貞,洪裕昌。領中樞無子子秉夔。三女金學性判書,李寅禹進士,徐翼輔檢閱。公以通才邃學。遭際英廟。首膺賢科。將大有展布。未數年禍變橫生。至於戕大質决大命。以脫親於不測。繼又卄載積誠。感回天心。由是眷注冞深。委寄冞重。顧至恫在心。以必退爲自靖。有除輒辭。辭而不獲則逡廵黽勉。雖望重三朝。位躋九卿。其所云爲。不過循法奉公而止。世莫不服其精義。而惜其用之未究焉。窃嘗論公之世。由公以上則祖景獻而禰文翼。由公以下則忠敬領樞之爲子。文肅羣從之爲孫。若公之中歲。盖亦極否矣。惟公能處坎而貞。遇屯而亨。卒有以光紹先烈。啓廸後人。以至沙麓鍾祥。誕育聖明。用基東方萬億年無疆之休。雖聲施靳於一時。而慶流家國。其不大且遠矣哉。公之孝。先王稱之。公之文。先人重之。定鉉敢誦君父攸訓。以爲孝文公銘。銘曰。

河源遙遙。崑崙自出。不有底柱。九派其失。趙始漢平。閥閱奕世。德行文學。名節勳勩。文翼暮年。君子道消。惟孝文公。執德不搖。搘危定傾。令聞令望。施及二子。益大以光。相乎將乎。爲國柱樑。至孫思濟。配我翼宗。誕我聖后。綏我大東。在昔英廟。寤寐良弼。廼夢廼科。公對第一。祥鳳方儀。僭人罔極。曰藩曰銓。以誣文翼。臣父之柱。臣以死明。正廟曰孝。其議惟輕。孝子不死。天監在玆。後十九載。昭之晰之。正廟曰孝。卿胡不仕。先卿未卒。賴有卿耳。移孝爲忠。事予一人。度支中權。藝苑成均。知卿用卿。展卿攸蘊。文詞爾雅。籌畫惟謹。臣敢自有。敢不盡瘁。若銓與藩。終始曲遂。公在韋布。孰擢之早。公在坎窞。孰爲全保。惟英廟聖。亦粤正考。崇高之位。古稀之齡。士誦遺文。家傳典型。譽星卿雲。吾猶及見。有考于德。銘詩是撰。

崇禎紀元後四庚戌 月 日  立」

舊厝階砌屢經修防之役文忠公以是爲憂久有營緬之意摠使君亦未遑焉歲己未承孝裕大妃旨以三月三十日移窆于是郡一東面機山負乾原夫人祔左公之系閥德」業具載原文而原永加 贈左贊成文忠寔寅永領議政配享 憲宗廟庭摠使卽秉夔也官兵曹判書 孝裕大妃尊爲 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大王大妃秉駿亦官行兵曹判書秉龜無育取秉駿第二男成夏爲嗣秉駿子敬夏成夏出后秉夔無男取三從縣令秉鍚次子寧夏爲后一女幼李寅卨今府使兪致善今參判金奭鉉今正郞金學性前判義禁徐翼輔承旨金世均今參判洪在元 贈吏曹參判尹致定今判書金冣秀牧使金大根前判敦寧從姪輔國崇祿大夫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致仕奉朝賀冀永追記」

外孫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金世均謹書」

이조판서 증영의정 시 효문 조공 신도비명

유명조선국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행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시 효문 조공 신도비명 병서

중표질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지실록사 윤정현은 글을 짓고,

손녀서 정헌대부 광주부유수 겸 남한수어사 규장각 검교제학 지실록사 김학성은 글씨를 쓰고,

척종손 정헌대부 형조판사 겸 지경연 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홍재철은 전액을 쓰다.

영중추부사 운석선생께서 나 정현을 오라 하여 분부하셨다. “선대부 효문공께서 세상을 뜨신 지 41년이 되었다. 유당에는 묘지가 있고 묘전에는 묘표가 있으며 전가에는 족보가 있고 시호를 청하는 데에 문서가 있으나 묘도에는 현각이 없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우리 선인을 알고 우리 선계에도 자세히 알기 때문에 이 일을 부탁하는 바이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효문공의 큰 절개는 정현이 감히 명을 지을 수 없어 감히 당해 낼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선생의 부탁은 더욱 간절하여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보국 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시 효문 조공의 휘는 진관이오, 자는 유숙이며 호는 가정이니 한양부 풍양현 사람이다. 시조 맹좌는 고려 태조의 개국공신으로 문하시중을 지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현달한 분은 이조참판 한평군 공숙공 휘 익정이오, 이밖에도 대대로 현달한 분이 있었다. 7대를 이어져 내려와 휘 도보는 돈녕부도정을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니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조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경헌공 휘 상경이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좌찬성에 증직된 문익공 휘 엄이다. 어머니 정경부인 풍산홍씨는 예조판서를 지낸 정헌공 정현보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임오년(영조 38, 1762년)에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신묘년에 처음 벼슬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미년에 익위사시직에 제수되었을 때, 임금이 양필의 꿈을 꾸고 구현과를 열어 과거시험을 열어었는데, 두 번이나 치렀으나 뜻에 찬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음직으로 벼슬에 나온 이들에게 친히 책문으로 시험하였는데 공의 대책이 첫째로 뽑혔다. 임금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조엄에게 아들이 있었구나.”라고 하고는 경헌공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부암의 고사를 인용하여 벼슬자리를 주며 장차 불차탁용하려고 내외직을 두루 시험하였는데,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하였다가 곧바로 광주부윤으로 옮겼다. 다음해 병신년(영조 52, 1776년)에 정조께서 즉위하자 홍국영이 한창 권세를 부렸는데 그는 본래 문익공의 엄정함을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언관을 조종하여 전주, 서번의 두 옥안을 꾸며 화풀이를 하려고 하였다. 공이 신문고를 두드리고 무함받은 실상을 조변하니 임금이 하교에 “자제로서 원통함을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 본도에 조사를 실시하라고 명함과 동시에 공을 의금부에 가두었다. 금부판당 채제공이 집안 소식을 일체 들이지 말라 하였는데, 어느날 밤 이졸 하나가 망녕되이 옥중에 전하면서 다급하게 문익공에게 사약을 내린다는 명령이 주어졌다고 말하였다. 공이 혼자 생각하기를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려 하다가 되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설 면목이 없다고 여기고 패도를 빼어 자결하였는데, 숨이 끊긴지 오래다가 다시 살아났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연거푸 ‘효자로다, 효자로다’라며 칭찬하고 즉시 옥에서 내보내고, 얼마 후에는 특별히 공이 자결한 일을 들어 문익공의 형을 감하고 이배하라 명하셨다.

정유년(정조 1, 1777년)에 문익공이 김해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시니 공은 상여를 받들고 시골집으로 와서 통곡하는데 예절을 지나쳤다. 홍국영이 죽자 추후하여 문익공의 직첩을 내주고 공 또한 군직에 붙여졌다. 무신년(정조 12, 1788년)에 임금이 문익공이 전조에 있으면서 속임을 당하였음을 말하고 공을 돈녕부도정에 제수하니 공이 감격하여 한번 사례하고 물러났다. 경술년(정조 14, 1790년)에 연로에서 상언하여 다시 문익공에 대해 조사하기를 비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다른 대신들은 이의가 없었으나 채제공이 의정부에 있으면서 복주하지 않았다. 공이 문앞에 자리를 깔고 간절히 빌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계축년(정조 17, 1793년)에 임금이 영조의 옛 신하들에게 추은하여, 품계가 가선에 오르고 한성부우윤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공은 또 상소하여 연전의 슬픈 호소를 말하였으나 담당 관리에게 협박당하여 사직하고 물러났다. 갑인년(정조 18, 1794년) 봄에 또 상언하니 이에 어사 이상황 공을 보내서 문부를 대조하면서 사핵안을 상고하여 비로소 일이 바르게 되니, 그제야 상신과 법관들이 한결같이 원통할 일이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시원스레 가르침을 내려주시니 소상하게 신원되었다. 대체로 공이 상언한 것이 세 번이고 상소가 한 번, 대명한 지는 오래여서 총 19년 만에 일이 비로소 밝혀진 셈이다.

무릇 죽었기 때문에 능히 어버이의 화를 늦추었고, 죽었다가 다시 살았기 때문에 또 능히 어버이의 원통함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니, 이는 하늘이 그 효성을 도운 것이나 공으로서는 자식으로서 분수를 다함만 알았을 따름이다. 가정 연간에 순리 왕서가 엄숭의 모함을 받아 대벽으로 논단되어 그의 아들 왕세정이 도끼로 베고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공의 부자의 일과 서로 흡사하다. 그러나 왕세정은 명황제에게서 얻을 수 없었으나, 공은 우리 정조 임금에게서 얻었으니, 참으로 일월과 같이 밝으신 밝은 재능은 백왕을 능가하신다 하겠다. 그러나 공의 효성이 옛사람 위에 훨씬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이 해에 우윤 동의금 형조 · 병조의 참판, 대사간, 비변사당상에 제수되었고 명을 받들어 혜정연표를 편찬하였다. 재신 한 사람이 소학의 구주를 고치기를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뛰어난 선비가 아니라 더하거나 덜어낼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받아들이셨다. 을묘년(정조 19, 1795년)에 사간원에서 사면령에 대해 논쟁하다가 그 일로 귀양갔는데 부모가 연로하여 속죄되어 예조참판 동춘추에 제배되었다. 혜경궁의 회갑에 글을 올릴 때 당시 승지였기에 품계가 가의로 올랐는데, 공이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 상소를 머물러둔 채 공을 불러 하교하기를, “선경의 못다한 일은 바로 경의 책임일진대 어찌 갑자기 물러나겠는가?”라 하고 또 빈연에서 그 부당함을 몇 백 마디로 하유하니 마침내 다시 더 청하지 못하고 도승지에 나아갔다.

병진년(정조 20, 1796년)에는 탐라에 배를 띄울 공역이 있어 라리포 구관당상에 차출되었다가 개성유수로 나갔는데, 민정을 묻고 지형을 살펴서 장단의 사천 서쪽과 금천의 대남 소남면을 개성에 할속하고 선비 중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자를 천거해 쓰고 유채의 잘못된 준례를 고치니, 고을 사람들이 화상을 그려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을 차려 받들었다.

정사년(정조 21, 1797년) 봄과 여름에는 연속으로 경상 · 전라 두 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사사로운 의리로 감영의 부임할 수 없어, 끝내 명에 응하지 않고는 장군 김응하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조정에 돌아온 뒤에는 정려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유사당상 겸 대사성에 제수되어 선비들을 시험치는데 문체가 아순한 것만을 취하니, 합격하지 못한 자가 사헌부에 고자질하여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헐뜯으니, 공이 대변하고 해직을 청하였다. 치마대 비문을 친히 받을 때 당시 승지였기에 품계가 자헌으로 올랐고, 무오년(정조 22, 1798년)에는 지춘추 도총관 지의금 공조 · 형조판서에 제수되어 경외의 옥사를 심리하였는데 평반이 많았다. 당시 중전을 주조하자는 의논이 있어 공이 헌의하기를, “돈을 만드는 물자는 백성들한테 나온 것인데 물자는 한정이 있고 돈은 날로 불어나면 여러 물품이 등귀하여 백성이 되려 해를 입습니다. 지금 인심은 점차 흐려지는데 또 기특한 물건을 만드는 것은 검박을 권장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호조판서로 임명되어서는 공정을 지키고 간폐를 척결하였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 봄에 병조판서로 임명되어 정사를 맨 먼저 인재가 지체되는 것을 없애는 데에 두어, 부모가 늙어 10년을 벼슬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먼저 임용하였다. 선혜청당상에 차출되니 임금이 하유하기를, “경은 호조에서 업무를 매우 근실하게 보았으니 선혜청에서도 그렇게만 하면 되오.”라고 하였다.

6월에 정조가 승하하자 국장당상에 임명되었고 동경연을 겸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날로 성을 나와서 간절히 말을 아뢰었다. “신은 여기에서 지극한 원통과 깊은 한이 있사옵니다. 지난날 신의 집에서 당한 감영의 일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전지가 장본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는 신이 죽는 날까지 마음에 맹세한 곳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신의 심충을 후세에 드러내 보일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체직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주교당상을 맡으며 장인을 감독한 일로 품계가 정헌에 올랐고 지경연과 실록사를 겸하였으며 호조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신유년(순조 1, 1801년)에 지돈녕에 제수되어 다시 형조를 맡았는데 사악한 옥사를 다스리면서 온화한 말로 평문하여 인륜으로 타일렀으나 죄인이 고집스럽게도 마음을 바꾸지 않다가 끝내는 법에 저촉되었다. 공이 탄식하기를, “저들이 스스로 제 잘못을 알지 못하고 즐겨 형틀에 나가게 되는구나! 내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혹시라도 스스로 깨닫고 평범한 백성이 되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뉘우친 자도 많았다. 우참찬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를 맡았으나 장용영의 일로 파직되었다. 임술년(순조 2, 1802년)에 판윤에 제수되었다가 곧 호조로 옮겼는데 그때에 궁방에 무토면세 800결을 떼어보내라는 영이 있어 법에 의거하여 논하고 중지시켰다. 또 군자감의 낭관도 태창의 예대로 부하 벼슬아치를 스스로 천거하여 오래 재직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예문관제학을 겸하였고, 부묘와 존숭양도감 및 장인을 감독한 일로 품계가 숭정에 올랐다. 계해년(순조 3, 1803)에 동성균을 겸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상소하기를, “30년 동안 마음속에 다졌던 바를 일조에 무너뜨리면 앞으로 어떻게 선신을 지하에서 뵙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호조판서로 옮겼다가 곧 병조판서로 옮겼고 판의금을 겸하고, 다시 선혜청을 주관하였는데 사직단의 악기를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날씨가 추워 옥을 캐기 어려워 영조 갑자에 정현악기를 개조하려다 연기한 예를 인용하여 봄까지 기다리기를 청하였고, 또 문묘의 악기를 옮겨다 쓰기를 청하였으며 황단의 예대로 풍운당의 악기를 우선 들여다가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갑자년(순조 4, 1804년)에는 좌참찬, 홍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호조를 맡았는데 건릉의 수개로 품계가 숭록에 올랐고, 인정전의 건조를 감독하여 준공한 뒤에는 말을 하사하는 은전을 받았다. 을축년(순조 5, 1805년)에는 정순왕후의 옥책문을 지은 공으로 품계가 보국에 올랐다. 공이 오랫동안 나라의 세부를 맡고보니 공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가 당시 재상에게 죄를 꾸며서 고자질하여 파직시켰고, 공은 누차 상소하여 선혜청당상까지 해직하였다. 다시 호조를 맡았으나 어머니의 나이 90세로 송흠 공과 이현보 공의 고사를 인용하여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할 것을 청하니, 비답에서 봉양차 화성유수에 제수하였다. 공은 봉급 3,000을 덜어내어 관둔전의 수갑을 쌓았는데 막료가 그 일을 기록하기를 청하니, 공이 거절하여 말하기를, “이 몸이 장차 은거하려는데 글은 남겨 뭘하느냐?”라고 하였다. 정묘년(순조 7, 1807년)에 다시 봉양의 청을 아뢰어 윤허를 받자 대부인을 모시고 조석으로 즐겁게 지냈으며 판돈녕에 재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것이 공이 벼슬길을 거치면서 행한 일들인데 전후로 제조를 맡은 곳은 종묘, 사직, 경모궁, 장용영, 내의, 상의, 장악, 승문, 사역의 제원과 관상, 전의, 선공의 제감과 내섬시, 사포서, 장원서, 전설사 등이다.

무진년(순조 8, 1808년)에 기로소에 들어가 윤 5월 15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70세이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저자를 닫고 조제하였으며 태상에서 시호를 올리기를 효문이라 하였다. 헌종 초년(헌종 1, 1835년)에 아들 충경공 국구의 추은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당초에는 원주 문익공의 묘소 우측에 장사하였다가 영평 광석리 손좌원에 이장하여 부인을 합부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진중하며 법도가 있었으며, 공의 백부 숙헌공이 성품이 엄준하여 허여한 사람이 적었으나 공의 말에는 매양 좋다하며 따랐다. 부마 간택으로 인하여 입궐하였는데 내시가 여러 아동을 이끌고 숙원을 뵈러 가니 공이 말하기를, “어떻게 후궁에서 부르는데 가겠느냐?”라 하고 진전을 지나다가 네 번 절하니 영조가 듣고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나이 15~16세 때에 공이 외손으로 상국 유공을 뵈었는데 그 자리에는 경기관찰사 유공이 있어 함께 언문으로 번역한 패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손님이 떠나자 공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 “공이 틀렸습니다. 어찌 한 말씀도 민정에 대해서는 없으십니까?”라고 하였다. 유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조생이 나를 공박하기는 하였으나 그 그릇이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공의 내외 형제들은 일찍 출세한 이들이 많았으나 공만은 혼자 휘장을 내리고 글만 읽어 이웃에서도 공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다. 그러나 명성은 은연중 드러나 한 주사가 마음을 쏟아 발탁하려 하였으나 공은 딴 곳에서 시험을 치루어 혐의를 멀리 하였다. 공은 검약으로 자신을 단속하여 갓의 장식도 꾸미지 않고 상자나 고리에도 장식이 없었다. 문익공이 서번으로 떠나자 도성문 밖에는 전송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공의 추한 도포, 파리한 말, 비옷, 안장 등을 본 사람들은 병신년의 화가 일어나자 탄식하기를, “그 사람의 검덕으로 어찌 잘못 죽는 사람이더냐?”라고 하였다. 초모 하나로 15년을 쓰고도 바꾸지 않고 말하기를, “이 노신이 선왕께 하사받은 것이니 이를 달구어 생을 마치련다.”라고 하였다. 세 번 병조를 맡고 여덟 번 호조를 맡았으나 전택은 더 늘은 것이 없고, 경서와 역사책 읽는 것만 좋아하여 거실에 들어가보면 질그릇 화분에 흙화로가 놓여 있으며, 한 밤중에 기름만 부으면 등은 저절로 비치는데, 매양 조문자가 말한 “살아서는 이익으로 사귀지 않고 죽어서는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는다.”라는 말을 되뇌이면서 말하기를, “내 이제 이만하면 부끄럽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선인의 무고를 씻기 전에는 평안도 사람의 하찮은 물건 하나도 접하지 않았고 평안도 땅에서 나는 것은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문익공의 상례와 염례에 선비의 예를 쓴 것을 지극히 한스러워 하여 유명으로 비단을 몸에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혹인이 말하기를, “선공께서는 규도가 넓으셨는데 공은 너무 겸손하니, 세상의 도로 자임하려 않는 것은 어인 일입니까?”라고 하니, 공이 사례하여 답하기를, “나는 선인에 비하면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소. 또 스스로 헤아려보아도 성품이 소략하고 우활하여 세상을 담당할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일은 화목하고 즐겁게 대했으나, 혹 대의를 담당하면 정도를 지켜 꺾임이 없었다. 경신년(정조 24, 1800년)에 조정에서 심연의 죄를 논하는데 심환지가 생명만을 살려주려 하자 공이 이가작의 일을 인용하여 반대하기를, “이 적이 만일 목을 보전한다면 상공은 천고의 죄인을 면치 못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역경을 깊이 연구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는데『역문』이란 책을 지어 스스로 이르기를, “평생 공부가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성력과 율수도 연구하여 이해하지 못한 것이 없었고, 일찍이 음악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말하기를, “임종의 소리는 흩어지고 율에 맞지 않는다.”라고 하여 살펴보니 종이 과연 가늘게 일그러져 있었으므로 늙은 악사들이 모두 놀랐다.

약관에 문익공을 경상감영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때 한창 조창을 짓는데 물자를 실어드리고 운반하고 한 비용이 하도 복잡하여 영리나 막빈이 능히 계산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계산하여 하루 저녁에 마쳤다. 글을 지음에는 경전과 역사를 본 바탕으로 하여 문채도 가하고 질실도 섞어 간결하면서도 난잡하지 않고 자상하면서도 장황하지 않았다. 문구가 까다롭고 글자를 어렵게 쓰는 것은 바른 법도가 아니라 하고 송나라 구양수를 본받았고, 시는 맑고 굳셈을 숭상하였다. 유고 몇 권이 있다.

나 정현의 선인은 공하고는 내외친이고 취미도 비슷하여 친형처럼 섬겼다. 내가 어릴 때에 공이 자주 우리 집에 들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용모가 청수하고 언소가 간소하여 햇볕처럼 따사롭고 산처럼 우뚝하며 금처럼 정하고 옥처럼 조촐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철없는 어린 나이에도 나도 몰래 숙연히 공경심이 우러났다. 선인께서 유배지에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세상의 작가로는 마땅히 가정을 첫째로 쳐야 할 것이나 아는 이가 없다. 나 대신 문형으로 천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가히 공의 문장의 정평이 된다 할 것이다.

부인 증 정경부인 홍씨의 본관은 남양인데 부사 정익빈의 따님이다. 공보다 10년 앞선 기미년(정조 23, 1799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1세이다. 정조께서 경연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듣자니 호조판서의 부인이 매우 부덕이 있었다 하던데 호조판서가 슬퍼함이 마땅하도다.”라 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만영은 영돈녕부사 풍은부원군으로 시호가 충경이오, 원영은 목사를 지내고 판서에 증직되었는데 막내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갔으며, 인영은 영중추부사이고, 딸은 병사 이복연, 서윤 김병문, 군수 윤경렬, 사인 이재문에게 출가하였다.

충경의 아들 병귀는 이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숙이오, 병기는 참판을 지냈으며 맏딸은 효유 헌성 왕대비로 이 분이 헌종대왕을 낳으셨다. 다음은 참봉 이인설, 승지 유치선, 감찰 김석현에게 출가하였다. 목사의 아들 병준은 판서를 지냈고, 사위는 이준, 진사 원세정, 홍우창이다. 영중추는 아들이 없어 병기로 아들을 삼았으며, 사위는 판서 김학성, 진사 이인우, 검열 서익보이다. 이복연의 아들 인달은 경력을 지냈고, 사위는 윤만식이다. 김병문의 아들은 현령 대균, 홍균, 승지 세균이오, 사위는 서윤 조병헌과 홍재원이다. 윤경렬의 아들은 목사 치용, 참판 치정이오, 사위는 부사 김최수, 김규선, 참판 김대근이다. 이재문의 아들 직현은 전령이오, 사위는 현감 김정균이다.

공은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영조대를 만나 맨 먼저 구현과에 응하여 장차 크게 전포함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해가 못되어 화변이 잘못 일어나, 죽음을 당함에 이르렀으나 공이 한 목숨 결단하여 부친을 헤아릴 수 없는 화에서 구해냈고 계속하여 20년간 정성을 쌓아 임금의 마음을 돌렸다.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지우는 더욱 깊어지고 위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나 지극한 원통 마음 속에 있는지라 반드시 물러나서 자정하기로 마음먹고 제수가 있으면 선뜻 사양하고, 사양하여 이루지 못하면 억지로 나와 어정거리기만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비록 명망은 3조에 높고 지위는 구경에까지 올랐으나 그 언행은 법을 지키며 봉사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그 정성과 의리에 감복하지 않은 이 없으면서도 쓰임을 다하지 못함을 애석해하였다.

공의 세계를 논하자면 공 이상으로는 조부는 경헌공이오, 아버지는 문익공이며 공 이하로는 충경과 영추가 아들이 되고 문숙공의 여러 종형제가 손자가 된다. 공의 중년은 비운이 극했다 하겠으나 공이 능히 불운에 처해서도 정고했고 좌절을 당해서도 형통하여 마침내 선열을 빛나게 계승하고 후인들을 잘 계도하였으니 그 규모 어찌 원대하다 아니하겠는가? 공의 효성은 선왕께서 칭찬했고 공의 글은 선왕께서 중히 여기셨다. 나 정현은 감히 군부의 말씀을 되뇌어 효문공의 명으로 삼는다. 명에 이른다.

하수의 근원은 멀고 멀어, 곤륜산에서부터 나오나

중류에 지주가 없었다면, 아홉 물줄기 모두가 흩어졌으리라.

조씨는 한평군에서 비롯하여, 그 문벌 세상에 혁혁했는데,

덕행과 문학과 명절과 공훈이라.

문익의 만년에는, 군자의 도 사라졌는데,

오직 효문공이 덕성 지켜 꺾이지 않았지.

위태함 고이고 기울음 고정하니, 영문과 영망 드러났네.

두 아들에 이어져, 더욱 창대하고 더욱 빛을 냈는데,

정승으로 장수로 나라의 동량 되었네.

손자에 이르러서는 현명함 같이 할 것 생각하여, 우리 익종에게 짝하여,

우리 성후를 낳으셔, 우리나라 평안케 하셨네.

지난날 영조께서는 자나깨나 어진 신하 생각하여

꿈을 꾸고 과거 보였는데, 공의 대책 첫째였네.

봉황이 바야흐로 날개 펼치려는데, 참소하는 사람 심술 망극하였네.

서번으로 전주로, 문익공을 골고루 무고했는데,

신하 부친의 잘못은 신이 죽음으로 밝히겠소이다.

정묘 이르기를 효로다, 그리고 논형을 가벼이 했는데

효자가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의 보살핌이 여기 있음이라.

그 후도 19년을 밝히고 또 밝혔다네.

정조 이르기를 효로다, 경은 어찌 벼슬하지 않는고,

선경이 죽지 않음은 경이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효성을 옮겨 충성하여 나의 한 몸을 섬길지어다.

탁지고 중권이고 예원이고 성균이고,

경을 알고 경을 쓸 터이니 경의 포부를 펼쳐 보려무나.

문사고 이아고 주획을 부지런히 하면서

신이 감히 몸을 돌보리까 감히 있는 힘 다하지 않으리까.

전서고 번병이고 종시토록 곡진히 다 이루었다네.

공이 포의로 있을 때 누가 일찌감치 탁용했던가.

공이 곤경에 처했을 때 누가 온전히 보호했던가.

오직 성스러운 영조와 정조였다네.

높다란 지위와 고희의 나이

선비는 남겨진 글을 읽고 집에는 전형 전하네.

상서로운 예성과 경운은 나도 뵈었던 바이라서

그 덕성 상고하여 명시를 짓네.

숭정기원후 4 경술년(철종 1, 1850년) 월 일에 세우다.

옛 묘소의 섬돌은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으나 문충공이 이 일로 걱정을 하여 오랫동안 이장할 의사를 가졌었고 총사군 또한 겨를이 없었다. 기미년(철종 10, 1859년)에 효유대비의 뜻을 받들어 3월 30일에 이 고을 일동면 기산 부건원에 이장하고 부인을 부좌하였다. 공의 계벌과 덕업은 모두 원문에 실려 있으나 원영은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문충은 인영으로 영의정에 헌종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총사는 바로 병기로 벼슬은 병조판서이다. 효유대비는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고 병준 역시 벼슬이 행 병조판서이다. 병귀는 아들이 없어 병준의 제 2남 성하로 후사를 삼았다. 병준의 아들은 경하와 성하인데 성하는 양자로 나갔다. 병기는 아들이 없어 삼종 현령 병석의 차자 영하로 후사를 삼았고 딸 하나는 어리다. 이인설은 지금 부사요, 유치선은 지금 참판이오, 김석현은 지금 정랑이요, 김학성은 전 판의금이요, 서익보는 승지요, 김세균은 지금 참판이요, 홍재원은 증 이조판서이요, 윤치정은 지금 판서요, 김최수는 목사요, 김대근은 전 판돈녕이다.

종질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치사 봉조하 기영은 추기하고, 외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세균은 삼가 글씨를 쓰다.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풍고집(楓皐集)』
  • 『운석유고(雲石遺稿)』
  •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김순동, 회상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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