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필자에게 주어진 "보학산책"이라는 제목 하에 이제까지 우리 족보의 연혁(沿革)을 더듬어 보았다. 필자라고 해서 이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지식이나 견문(見聞)이 있을 수는 없고 다만, 역대 족보의 기록이나 기타 문헌에 기술되어 전하는 것을 간추려서 서술해 본 것인데, 독자 제위에게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번의 기고를 매듭으로 우리 족보의 연혁사적(沿革史的) 기술은 일단 마감하려 한다.

어느 문중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이와 같이 어려운 족보 간행 사업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올 수 있었다는 것은 종중(宗中), 종친회(宗親會), 종약원(宗約院), 또는 화수회(花樹會)로 불러지는 문중단체(門中團體)가 있기 때문이었으며, 이러한 단체는 또 그 문중에서 가장 벼슬을 많이 한 가문의 주관하에 그 사랑방에서 운영되어 왔던 것이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 거의 공통된 사실이다.

우리 풍양조씨의 대종회(大宗會)가 어느 때 어떠한 경로를 거쳐 창시(創始)되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을 통해 고찰해 볼 때 조선 왕조의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우리 시조 산소(始祖山所)의 역내(域內)에 공빈김씨(恭嬪金氏 : 선조대왕이 후궁이요 광해군의 생모임)의 입장(入葬)으로 시조 산소가 이장(移葬) 당할 뻔했던 때부터 종친회의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유야무야(有耶無耶)했던 존재에 충격적인 사건은 이를 결집(結集)시키고 활성화(활성화)하는데 촉진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우리 종친회는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많이 해온 가문들의 융성과 더불어 장족의 발전을 하여 후세에 길이 남을 많은 업적을 남겨 온 것이 사실이며, 필자가 지금까지 서술해 온 전후 4차에 걸친 세보 간행사업(刊行事業)도 그 중의 한 분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사정이 달라지면서부터 우리 종친회의 사정도 달라지게 되었다. 곧 종친회를 이끌어 왔던 가문은 벼슬을 많이 했던 가문이었고, 그 가문의 힘은 나라에서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었는데, 그 나라가 송두리째 멸망하게 되니 그 가문들이 설 땅을 잃게 되고, 따라서 종친회도 자연 무력화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좀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1900년에 우리 4중간보(四重刊譜)가 발간된 10년 후인 1910년에 조선왕조가 멸망하고부터서는 대종회(大宗會)에서 이룩한 사업이라고는 거의 없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중앙 종친회가 무력해져 갔던 반면에 각 종파별로는 매우 활발한 족보 간행사업이 전개되었었다. 그리하여 4중간보를 간행하고서부터 5중간보를 간행할 때까지 70여 년 동안에 각 종파 별로 파보(派譜)를 한 번도 간행하지 않은 종파는 하나도 없다 하겠으며, 그 중에서도 회양공파(淮陽公派)에서는 각 소종파(小宗派) 별로 간행한 것이 무려 10여 차례에 달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기간을 우리 보학사상(譜學史上)의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어떤 통일된 규칙이나 통제없이 각기 자파의 의사, 그것도 주간자 몇몇 사람의 의사에 따라 편찬되었기 때문에 들쭉날쭉이 매우 심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이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이 아주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로 별로 하는 일 없이 그저 제사(祭祀) 지내는 것과 재산을 관리하는 것 정도로 명맥만을 유지해 오던 우리 종친회는 8·15해방을 맞으면서 일대  체제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말하자면, 사대부 중심으로 그 분들 사랑방에서 운영되어 오던 옛날 체제를 벗어나 회원 중심으로 독립된 사무실에서 운영하는 근대 체제로 탈바꿈하는 필연적인 나타남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1949년 11월에 화수회 창립 준비위원회 구성, 동년 12월 말에 발기인 회의 개최, 이듬 해인 1950년 1월에 창립총회를 열어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에 임정요원(臨政要員)이시던 완구(琬九 : 號 藕泉)씨가 추대되신다. 그러나 그 해에 6·25동란의 발발로 완구씨는 납북되고 온 국토가 전쟁터로 변하게 되니 화수회의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던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1954년 5월에 이르러서야 화수회 재건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1956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2회 정기총회를 열어 대연(大衍 : 號 笑隱)씨를 2대 회장으로 추대하여 극심한 재정난을 겪으면서도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여 왔으나 1961년에 대연씨께서 별세하시게 되니 두 분 모두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에, 덕망에 비하여 안정된 큰 사업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62년 가을에 와서야 삼부토건(주) 사장 정구(鼎九 : 號 肅齋)씨를 3대 회장으로 추대하여 우리 조씨문중의 5중간보가 여기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가 무오보(戊午譜)라고 불러 오는, 지난 1978년애 간행된 5중간보의 간행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종파(宗派)에서는 각기 파보를 간행하여 왔으며, 어떤 파보는 간행된 지 몇 해 되지는 않았는데, 우리 종친간에는 1974∼5년 경부터 대동보를 간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주창(主唱)하신 분이 화수회 부회장 동진(東振 : 당시는 有司였음)씨로 당시 화수회 간사로 있는 필자에게 거의 매일 같이 5중간보 간행을 역설하시는 것이었으나, 족보 간행사업이 얼마아 어려운 지를 1960년에 간행된 회양공파보 간행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쉽사리 그 제창에 동조해 드릴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완곡히 회피해 왔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동진 부회장께서는 더욱 열을 올리시어 만나는 사람마다 설득(說得 : 원 발음은 세득) 작업을 벌이시었다.

그러던 1975년 가을 제21회 화수회 정기총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화수회장을 방문했던 어느 날 회장께서는 용무를 다 마치고 나서는 필자에게 물으시기를

  "족보를 간행하자는 의견이 많은 것 같은데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이 너무 거창해서 함부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필자의 답변을 듣고 난 회장께서는 그 분 특유의 신중한 태도로

"가부(可否)나 한 번 묻도록 함이 어떨까"하시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것마저 못하겠다고 할 수가 없기로 그 해 10월 27일에 열렸던 제21회 정기총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5중간보 간행의 건"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가부 의사를 물었던 것이고, "좋다"는 의견이면서도 "너무 갑작스런 제안이라서 당장에 가부 의사 표시가 곤란하니 공문으로 시달해 주면 충분한 협의를 통하여 찬반 의사를 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인 1976년 여름에 이를 공문으로 통지하여 찬반 의사를 물었던 바,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므로 필자도 그제서야 사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 먹고 "5중간보 및 세록 수단 규정" 등 기초 문안을 부랴부랴 기초하여 그 준비를 서둘렀다.

그 해 11월 20일에 열렸던 22회 화수회 정기총회에 상정하여 "풍양조씨 세보소(豊壤趙氏世譜所)"라는 별도 기구를 탄생시켜 중림동의 화수회 사무소에 보소(譜所)를 병설하고, 사업을 착수한지 2년 만인 1978년 말에 거의 제작을 완료, 이듬해 봄부터 분질을 개시했던 것이다.

5중간보의 특징이랄까 종전의 족보와 그 기재방식(記載方式)을 달리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종전에는 출생년대 만을 기재하던 것을 생년월일, 그것도 음양력을 구분하여 기재하고 간지(干支)로만 표기하던 연대를 서기(西紀)를 병용(倂用)함으로써 알기 쉽게 하였다.

  (2) 종전에는 이력란(履歷欄)에 관직(官職)에 국한시켜 기재하던 것을 직업을 모두 기재토록 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역대 조상의 직업 변천을 알 수 있도록 하였는데, 제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획기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종전에는 여자(女子)의 이름은 표기하지 않은 것이 준례였으나 이번에는 모두 표기토록 하였고, 특히 딸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같이 크게 써주고 생년월일과 학력 등도 아들과 똑같이 써 넣도록 하였다. (단, 사망 연월일과 묘소는 관할하지 않았음)

이 밖에도 시대의 변천에 순응하여 그 기재방식을 달리한 것이 많이 있는데 대체로 일반의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대수(代數)가 늘고 인구(人口)가 많아짐에 따라 커다란 책에 큰 글자로 인쇄했던 종전의 방식을 바꾸어 이름은 4호, 방주(傍註)는 6로 활자로 축소시켜 4×6 배판으로 조판하였어도 총계 6,066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편집물이었다. 이를 7책으로 분할하여 2,500질을 인쇄하고 양장으로 제책하였다.

한편 이번에는 역대 조상들의 행장이나 비문을 중심한 문헌(文獻)을 수집 편찬하여 세록(世錄)이라 제명(題名)하고 한문(漢文)으로 된 원문에 어석(語釋)과 역문(譯文)을 첨부하여 2,444페이지로 조판된 것을 3책으로 분할 인쇄하였다.

세보보다는 2년이 더 걸린 1981년 5월에 2,000질을 인쇄하여 세보와 같이 분질해 오고 있다. 세보는 2,500질이 소진되고도 부족하여 지난 1984년 겨울에 500질을 재인쇄한 바 있으며, 현재는 세보·세록 모두 얼마 남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번의 간행사업에 있어서 그 조판  작업을 다른 업자에게 위탁하지 않고 우리가 그 시설을 장만하여 자가조판(自家組版)했던 것은 특이한 것이었는데 상당한 경험자가 아니고서는 성공 쪽보다는 실패쪽으로 갈 확률이 더 많다는 것을 첨가하는 바이다.

5중간보에 관해서는 필자도 계획부터 분질까지 시종 함께 종사해 온 터이므로 얼마든지 더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면 관계상 이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앞으로 족보하는 데에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되는 몇가지 사항을 열거해 보려 한다.

    (1) 모든 기록은 정확성을 기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정확하지 않은 기록은 없는 것만도 못하다. 따라서 족보에 기재되는 모든 기록도 정확해야만 될 것인데, 간혹 그렇지 못한 예가 적지 않음을 본다. 그 원인을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가. 자신이나 자기 가족의 기록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한 사람이 많다.

평소에 자기 가족의 생일이나 조상의 제삿날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이를 너무 등한히 하는 탓으로 족보를 하게 되어 이를 조사하러 온 사람에게 정확한 자료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정확을 기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족보의 기록이 어떤 법률상의 증거 자료로 채택되어 커다란 피해를 겪기나 해야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나, 그런 문제를 떠나 정확한 기록을 유지하려는 마음가짐을 누구나 간직해야 할 것이다.

    나. 착각으로 인하여 기록의 정확성을 잃는 경우가 있다.

    첫째로는 기일(忌日)의 날짜이다.

대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제사 풍습은 사망일의 첫 새벽에 지내왔으므로 보통 말하기를 사망일 전날의 저녁을 제삿날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1월 10일에 죽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10일의 오전에 죽었건 오후에 죽었건 간에 기일(忌日)은 1월 10일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기일을 1월 9일로 기록하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으로 1월 10일에 죽은 사람의 제사를 1월 9일 지낸다고 생각한 데에서 오는 착각이다. 1월 9일의 밤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1월 10일, 곧 사망한 날의 새벽(첫 닭이 울기전)에 지내는 것임을 안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으리 믿는다.

    둘째로는 내외합장(內外合葬)일 경우 좌우(左右) 구분의 혼동(混同)이다.

종전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내외합장을 많이 해오기는 하였으나 묘지의 국토 침식이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도 합장(合葬) 제도는 더욱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합장일 경우 족보에 기록하는 방식은 부인의 시신(屍身)을 남편 시신의 좌편에 매장했으면 " 부좌(부左)"라 표기하고, 우편에 매장했으며 "부우(부右)"라고 쓰는 것이 상례이다.

그런데 해석에 따라서는 정 반대로 표기되는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좌우(左右)의 구분을 죽은 사람을 기준하지 않고 묘소를 마주보고 절을 하는 산 사람을 기준할 때는 좌우 쪽이 정반대로 바뀌이는 것이다.

필자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 내기 위하여 예문에 밝다고 알려진 몇 몇 인사를 찾아 상의해 보았는데, 또한 정 반대의 의견이 나오기도 하였으나 죽은 사람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게 되었으므로 그 방향으로 유도(誘導)해 가고 있다.

    셋째로는 예를 들면 10세조(十世祖)와 10대조(十代祖)에 관한 이견이다.

이는 곧 세(世)와 대(代)의 개년에 원인한 견해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1세라면 아들은 2세이나, 대(代)로 치면 1대이므로 10세조(十世祖)는 9대조(九代祖)"라고 보는 견해와, 자기(自己)→ 부(父)→ 조(祖)→ 증조(曾祖)→고조(高祖)→5세조(五世祖) 또는 5대조(五代祖)라는 산법(算法)으로 "10세조는 곧 10대조이다"라는 견해 차이이다.

이에 관해서도 각자의 주장이 매우 강경하여 전자의 의견에 따르는 어떤 학자는 "10대조가 10세조와 같다는 것은 모두 틀린 것"이라고 단정하는 가 하면, 이를 반대하는 어떤 학자는 " 그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해"이다.

그런데 우리 조씨의 역대 비문을 상고해 보면 모두 후자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중국에서는 어떤 계산법을 쓰고 있느냐는 것을 중국 고전을 통하여 추적해 가고 있는 중인데, 중국인들의 기질이 좀 철저치 못한 구석이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직 확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독자들의 고견에 묻는 뜻으로 이렇게 적어 보는 것이다.

    (2)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하여는 인쇄·교정의 철저를 기해야 한다.

필자는 1항에서 기록을 작성할 때 원칙적으로 틀리기 쉬운 것을 몇가지 지적하였지만 비록 기록의 자료는 아주 정확하게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정작 인쇄되는 기록이 틀린다면 모두가 허사인 것이다.

그런데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거니와 교정을 볼 때는 다 정확한 것 같아서 교료(校了) 또는 o.k를 써주지만 인쇄된 것을 보면 틀린 것이 비일비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만 써오는 문자이기는 하지만 교정보는 작업을 "소진지역(掃塵之役)" 곧 "먼지를 쓰는 일"이라고도 한다. 먼지는 비로 쓰면 쓸수록 자꾸 나오듯이 교정도 보면 볼수록 오자(誤字)는 자꾸만 나오게 된다는 뜻이다. 밥만 먹으면 교정만 보는 출판계나 신문계 종사자들도 간간 오자의 발생으로 인하여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은데 더욱이 비전문가인 문중의 노령(老齡)의 인사들에 의하여 교정을 보게 되는 족보는 상상외로 오자가 많은 것에 안타깝기만 하다.

교정은 적어도 정선된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여러차례 반복하여 꼼꼼히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이 계제에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

    (3)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은 완전 고립(孤立)된 나가 아니라, 조상과 자손을 연결하는 존재라는 마음가짐으로 족보에 너무 무관심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필자는 왕왕 일가들로부터 참으로 안타까운 호소를 들을 때가 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조상은 옛날에 충청도 임천에서 살았고 덕림종중의 세향에도 다니셨다’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자손이 되는지" 그 내력을 찾아 달라는 식의 주문이다. 어떤 아낙네들은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서"라며 소리 없는 눈물까지 흘린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정확한 계통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올라 별을 따기. 그리하여 "좀 더 두고 찾아보자"느니 "출세는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족보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라느니, 위로의 말로 얼버무리려니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이것은 알고 보면 전란(戰亂)이나 생활고(生活苦) 등의 피치 못할 사정에서 그렇게 되는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그 어떤 세대에, 족보에 너무 무관심한 것이 자손에게 그와 같은 정신적인 고통을 주게 되는 쪽이 많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지난 1960년에 발간된 회양공 파보 때의 일이었다. 어떤 지식도 있는 일가 한 사람은 족보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반대하여 필자의 간곡한 권유에도 끝내 족보에 참가하는 것을 거절하고 말았었다. 그런데 한 10년이 지난 어느날 그 일가가 찾아와 "족보를 한 질 구하여 거기에다 들어있지 않은 자기 가족의 이름을 넣어서 만들어 달라"는 것.

비용은 얼마가 들던 달 게 부담하겠다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하여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근간에 며느리를 보았는데 그 며느리가 시댁의 족보를 알고자 한다"는 것. 이 일가는 그제서야 지난 날의 자기 고집을 후회하는 모양이었는데 필자는 말하였다.

"족보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요 다음 기회에나 빠지지 말고 들도록 하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