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옛날 우리 조상들은 책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필자가 어려서 글방에 다닐 적만 하더라도 책천 부천(冊賤父賤)이란 훈장의 꾸지람을 자주 들었었다. 곧 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제 부모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는 지독한 꾸지람인 것이다.

그 책들 중에서도 족보 책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대상물이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수레를 타고 길을 가다가도 나라의 호적부(互籍簿)를 지고 가는 사람과 마주치면 반드시 몸을 굽혀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셨으니(式負版者 : 論語 鄕黨篇) 그 나라의 백성에 대한 경의에서였다. 그러니 더욱이 여러 대의 조상과 자손들의 이름이 실려 있는 족보를 가장 소중히 여겼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족보를 간직하는 것을 특별히 "모신다"고까지 받들어 말하게 되었다. 보소(譜所)에서 족보를 "모셔다가"소중하게 "모셔놓고". 열람을 할 때는 돗자리를 깔고 책상을 놓은 다음 그 위에 족보를 "모셔놓고" 정좌하여 정중하게 펼쳐본다. 이것이 옛날 선비들의 족보를 소중히 다르던 모습이었거니와 어떤 의미에서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이 지나치다 보면 족보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기까지 하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지는 일이 있기조차 하지만.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다. 너무 지나친 공손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족보나 빗돌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아들이 아버지의 회갑에 청첩을 내게 되어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표기할 때, "함 복동(啣 福童))"이라 하면 될 것을 "복자 동자(福字 童字)"식으로 표기하는 것 등은 모두 지나친 일들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각설하고 가던 길로 되돌아가 우리 족보의 걸어 온 자취를 다시 더듬어 보기로 한다. 우리 종중에서는 순조(純祖) 26년(1826)에 병술보(丙戌譜)를 간행한 지 75년만인 광무(光武) 4년(1900)에 다시 대동보를 간행하였으나 이것이 우리 조씨의 네 번째 대동보인 경자보(庚子譜)이다.

지금 전해 오는 문헌을 추적하여 보면, 2년 전인 광무 2년 무술년(1898) 8월에 간산공 병필(幹山公 秉弼 : 內部大臣, 靑校派), 우당공 동면(藕堂公 東冕 : 吏曹判書, 漢平君派), 화농공 희일(華農公 熙一 : 公曹判書, 南原公派) 세 분에 의하여 발기되었다. 보소를 교동(校洞 : 현 인사동 부근)의 보국댁(輔國宅 : 知中樞事 敬夏 宅)에 설치하였다.

2년간의 작업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데, 서문은 발기인의 한분인 간산공께서 쓰고, 발문은 풍안군(豊安君 :흡)의 종손(宗孫)인 풍선군 동만(豊善君 東萬 : 吏曹參判)께서 썼다. 부록 1책을 합하여 29책 1질이었으니 신해보 3책, 경진보 10책, 병술보 16책 책에 비할 때 엄청나게 방대한 규모라 할 수 있다.

그때 전례에 따라 받아들인 재정 상태를 살펴 보면, 예목전(禮木錢 : 찬조금)이

 

     청도군수 병길(淸道郡守 秉吉)    30량

     아산군수 병철(牙山郡守 秉哲)    30량

     개천군수 선영(价川郡守 善永)    30량

     금성군수 철하(金城郡守 哲夏)    30량

     영광군수 기하(靈光郡守 夔夏)    50량

     양주군수 정구(楊州郡守 鼎九)    30량

 

 등으로서 합계 200량이었고, 각 파에서 거두어 들인 명하전이 7,155량이었는데 모두 간행 비용에 충당되었다. 그 당시의 다른 물가를 조사 대조하기 전에는 그 금액의 다과에 감이 잡히질 않는다.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 몇 가지를 살펴 보기로 한다.

  첫째, 경자보는 서울에서 간행된 점이다.

3중간까지는 대구의 경상 감영에서 간행해 왔었는데, 이번은 서울에서 간행되었던 것이니 이는 그 당시에 경상감사로 나간 일가가 없었거나 다른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활판으로 인쇄된 점이다. 그 때의 범례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구보(舊譜)는 모두 판각(板刻)으로 간행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책의 장수가 너무 많고 재정은 모자라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활자로 인쇄하고 서문 등 머릿 권의 문건과 부록 1책만은 큰 변동이 없으므로 옛날의 판각을 이용하여 인쇄한 것으로"되어 있다.

  셋째, 이는 전직공파(殿直公派)에만 해당하는 일이지만 그 무렵에 항렬(行列)이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이 항렬이란 것을 살펴보면 재미나는 점이 없지 않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려시대에서 조선조 초기에 걸쳐서는 항렬의 통일이 4촌을 넘지 못하였고, 조선조 중기 이후로는 대개 소종파(小宗派) 별로 다르게 제정하여 사용해 왔었는데, 이 무렵에 이르러 신정왕후(神貞王后 : 俗稱 趙大妃)의 수렴청정(垂簾聽政) 때에 그 분의 명령으로 통일하여 사용토록 된 것이다. 이것이 4중간 경자보 범례의 제1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옮겨 보면.

"각 파의 항렬은 현 상감이 등극하신 후의 무진년(戊辰年 : 고종 5년, 1868)에 조령(朝令) : 신정왕후의 명령을 뜻함)에 의하여 모두 쌍동파(雙洞派)에 따르기로 하였으니 이제 태어나는 사람의 항렬을 동(東)자부터 규(揆)까지 10세(世)를 특별히 새로 정한다(名派行列 今上戊辰, 因朝令, 皆從雙洞派 而方生之行 自東字 至揆字 凡十世 特爲新定)"

말할 것도 없이 신정왕후는 우리 조씨로서 풍은부원군 만영(豊恩府院郡 萬永)의 맏 따님이시다. 이 어른이 어찌하여 친정 가문의 항렬을 통일시키라고 명령하셨는지 문헌상의 확실한 기록은 아직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어떤 분은 " 그 당시 친정 가문의 권력 다툼에 충격을 받아 돈목을 강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도 하고. 흑자는 "우리 조문(趙門)의 어떤 집에서 먼 촌수의 양자를 하였던 바 항렬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소목(昭穆)이 맞지 않아 파양(罷養)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분도 있으나 모두 아리송한 말들이므로 이 문제는 결론을 유보하기로 한다.

여하튼 간에 상주 호군고파(護軍公派) 중의 북파(北派)에서는 윗 대에 동(東)자 항렬이 있기 때문에 동(東)자를 만(萬)자로 바꿔쓰고, 서천 풍옥헌공파(風玉軒公派)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誠)자를 성(盛)자로 바꿔쓰는 외에는 전직공파에 속하는 자손들 모두가 이에 따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먼저 병술보(丙戌譜)를 역대 간보사업(刊譜事業) 중에서 가장 말이 없고 완벽하게 된 족보라고 평가한 바 있었다.

그 말속에는 경자보(庚子譜)는 병술보만 못하는 뜻도 들어 있다고 추리할 수 있거니와 그것이 사실이다.

인쇄·제본·용지 등의 겉모양도 못하고 그보다도도 내용면에서는 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족보를 청보(淸譜), 또는 제가지최(諸家之最)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명확하게 기록한 점이었다"고 말한 바도 있다. 그런데 경자보는 그런 면에서도 점수를 깎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 더러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단 한가지만을 소개해 보려 한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집안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가로되 "고종황제께서는 한때 아관(俄館)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라서 공관에는 아라사 말을 잘하는 조×규(趙×圭)라는 선계불명(先系不明)의 풍양 조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고종 황제를 잘 모셔 도왔으므로 고종 황제의 눈에 들어 그에게 참서(參書)라는 벼슬을 주고 총애하였다.

그 후 우리 조문(趙門)에서 경자보를 간행하게 되자 그는 입보(入譜)를 희망하였고 고종 황제께서도 입보시켜 주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 당시의 찬반논쟁(贊反論爭)의 실상은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가에 그는 자손의 존재가 불분명한 곳으로 대어주었느리라"고

이상이 필자가 어려서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그 곳의 주(註)에 보면 "본파(本派)에서 올린 단자(單子)를 살펴보건대 그의 증조가 타향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자손이 못살게 되었으므로 구보(舊譜)에는 누락된 것이나,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계첩(系諜)이 소상한 것을 보면 확실한 증거가 되기로, 오늘 날 공의(公議)에 회부하였더니 모두 입보시켜 주라하고 또 그 지역으로부터 올라 온 통문에서도 확실하여 의심할 바 없다는 이유를 진술하여 왔으므로 종의(宗議)를 거두어 넣어 준다"로 되어 있다.

이렇게 1대 1의 상반되는 말을 듣고 보면 그 진위를 판가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물론 필자는 후자의 기록이 날조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데 그 기록이 과연 날조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을 근자에 발견하게 되었다. 필자는 1983년에 상주 일가 어른들의 유고(遺稿)인 신옹지강연방고(莘翁 芝岡聯芳稿)란 한적(漢籍)을 국역(國譯)하였다. 신옹공의 휘(諱)는 남용(南龍), 지강공의 휘는 남표(南豹)로서 그 아우이거니와 누대 문한가(文翰家)의 후예로서 그  글들은 공신력(公信力)이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신옹공의 문집중에 경자보 때에 상주의 보단(譜單)을 휴대하고 서울의 보소에 다녀간 일기(日記)가 있는데, 그 일기에 "부정한 명색을 가지고 있는 조가(趙哥)가 한 사람이 바야흐로 궁중에서 세력을 잡고 있는데 세력을 끼고 족보에 들아오고 싶어 하여 전교(傳敎 : 임금의 명령)까지 나왔다 하니 보사(譜事)에 곡절이 있음을 알만 하다(不正名色之一趙人方有 勢於宮中 而挾勢 欲入於譜中 而出傳敎云 可知 譜事之有委折)"한 대문이 있었으니 필자가 경자보의 기록을 날조라고 보았던 판정이 사실임은 더 이상 변명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경자보에는 그의 아들 한 사람이 실려 있기는 한데, 그 후로 아무 소식이 없어 어찌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만약 그 자손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이제 와서 그의 체면을 봐서라도 이처럼 노골화하여 쓴다는 것은 생각할 일이겠으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실대로 적어 본 것이다.

맹자는 말씀하시길 "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오래인데 그 역사는 일치 일란(天下之生 久矣 一治 一亂 : 孟子등文公下參照)"이라 하였다. 500년 사직을 보전하여 오던 조선 왕조도 미구에 망하고 말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무렵이었으니 우리 종중의 일이라 하여 항상 잘 될 수만은 없었다고나 할까.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쌍동(雙洞) : 서울 남산 동쪽의 현 옥수동(玉水洞)으로서 훈·박동파(勳·박洞派)의 선조되시는 도정공(都正公 : 道譜) 이래로 여러대를 세거(世居)해 온 곳으로서 신정왕후께서도 그곳에서 탄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