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풍양조씨의 창간보인 신해보(영조 7년, 1731)는 실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발의(發議)한 지 장장 17년 만에 출판된 역사적 간행물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완전무결이란 있을 수 없듯이 이 신해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자면 기록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어떤 사물 현상의 어느 한 시점을 잡아 문자로 표현하는 것인데, 17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생사(生死), 혼가(婚嫁), 과환(科宦)등 인사상(人事上)의 변동이 많았던 것이고, 또 규명해야 할 의문점을 밝히지 못한 채로 각자(刻字)에 회부했던 바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당시에는 교통과 통신이 아주 불편하여 "관향을 같이하는 종족은 모두 수록한다"는 대보의 성격을 놓고 보더라도 미진한 점이 허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간행을 전담했던 귀록공(歸鹿公)께서도 말미(末尾)에 첨부한 지문(識文)에서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수정을 가하여 다시 간행하였으면…….하는 아쉬움을 표명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중의 숙제는 영조 27년 신미년(1751)에  무주공 지명(茂朱公 祉命)과 영호공 엄(永湖公 엄)께서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으로서 당직(堂直)하면서 교환했던 대화에 올라, 수정(修正). 재간(再刊)을 다짐하게 된다. 그 때의 세자는 후에 말하는 사도세자(思悼世子)였고 세자의 기거와 경호를 담당하던 기관이 세자익위사이며, 7등급의 자리가 있었는데 시직이란 째마리에서 둘째이다. 이로부터 8년이 경과한 영조35년 기묘년(1759)에 이르러서는 이 두 어른의 명의로 "족보를 수정 간행하자"는 통문이 나오는데 거기에 수정이란 낱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어 있다. 그 여러가지 내용중에서도 당시 가장 관심이 집중됐던 것이 시조 시중공 이하 6세 실전에 관한 고증이었기로 여기에서도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신해보(辛亥譜)에는 시조 시중공의 휘자(諱字)밑에 차하세계실전(此下世系失傳), 곧 "이로부터 아래로는 세계가 실전되었다"고 기록하고 그에 관한 주(註)를 달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간공 운흘(石磵公 云흘)의 자찬묘지(自撰墓地)에 의하면 ‘태조공신(太祖功臣) 조맹(趙孟)의 三十대손’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천화공(天和公 : 殿直公을 가리킴)은 시조의 24대손이 된다. 다만 여러 가문의 족보를 상고하건대 고려 5백년(정확히 말하면 475년임) 동안에 댓수가 많아야 20대 미만에 불과했으니이 묘지에 있는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일지도 모르겠다"는 것.

그리하여 그때 "단정(斷定)할 수가 없다"하여 전직공을 별행으로 잡아쓰고 1세(一世)로 쳐서 기록하였다.

위와 같은 기록의 경위를 다시 부연(敷衍)하여 보기로 한다.

석간공의 자찬묘지란 우리 세보상 전직공(천화공이라고도함)의 6대손 되는 휘 운흘(諱 云흘)이 자신의 사후에 쓸 묘지를 스스로 지은 155자의 짤막한 문장을 말한다.

석간공은 고려 말엽에 태어나 이조 초기까지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대문장가로서 호군공, 회양공, 금주공과는 재종간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에 올라, 5개주의 수령(守令)과 4개도의 도백(道伯)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을 베풀었고, 나라가 어지러워가자 상주 노음산(露陰山)에 은거하였다가 조선이 건국된 뒤에 다시 출사하여 한 때 강릉부윤을 지냈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광주(廣州)의 고원성(古垣城 : 현 천호동)에서 살다가 별세하여서는 양주(楊州)의 아차산(峨嵯山 : 현 워커힐 뒤산)에 묻히었다.

공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의 유작(遺作)이 많지는 않지만 편저(編著)로서 삼한시 귀감(三韓市龜鑑)이 전하고 몇 편의 시(詩)와 산문(散文)이 흩어진 채로 소개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공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읽어보면 생동감이 넘치는 주옥같은 직품들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나라의 역대 문장가 중에서 공만큼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을 남긴 분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아마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공에게 후손이 있었다면 그 이름은 더욱 드러났을 것이고 그 후손된 긍지도 만만치는 않았겠지만 불행히도 후사(後嗣)가 없다.

그건 그렇고 공이 자찬(自撰)한 묘지(墓誌)는 고려사 열전(高麗史 列傳)에 실려있는 것이 가장 오래된 원전(原典)이다. 한데 그 원전에 "조운흘은 본관이 풍양인인데 고려 태조의 신하 조맹의 삼십대 손이다(趙云흘本豊壤人 高麗太祖臣平章事趙孟三十代孫)"라고 쓰여 있으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옛날 신해보 이전의 각 가보(家譜)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전직공을 시중공의 24대손으로 직서(直書)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식자의 눈으로 볼 때는 시중공께서 살아 계셨던 고려초기로부터 석간공께서 태어나던 고려 말엽까지는 410년∼420년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해서 30대라는 댓수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 4백 10∼20년 동안에 30대가 나려면 종손으로만 전하여 15세∼16세 사이에 출생했어야만 가능하다는 계산인데 실제로는 이러한 조기 출산이 줄곧 있을 수는 없다는 선인(先人)들의 결론이다.

그리하여 三十대의 三자는 二자의 착오라 하여 20대라는 주장도 있었던 모양이나 타성씨(他姓氏)들의 것을 보면 모두 동 기간의 댓수가 한결같이 10대에서 11, 12 또는 14, 15대에 불과했다는 예를 들어 이것 또한 믿을 바가 못된다고 부인한다.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 생각해 낸 것이 고려사 열전에 三十대손으로 된 것은 十三대를 거꾸로 쓴 착오임이 분명하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규명함에 있어서 심중이나 추리보다는 객관적인 서증(書證)이나 물증(物證)을 중요시했던 것은 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터에 훤해질 만큼 반가웠던 서증이 출현하였으니, 송창공 휘 종운(松窓公 諱 從耘 :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으므로 안음공이라고도 하고 세자 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 翊贊) 벼슬을 치렀으므로 익찬공이라고도 한다)의 편저인 씨족원류(氏族源流)란 책에 또한 석간공의 자찬묘지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13대손으로 명기되어 있고 전직공의 이름 위에는 시중공의 7대손이라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족보에 관한 연구가 하나의 학문 분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가계(家系)를 중요시하는 당시 유교사회의 경향에서 파생 발달한 현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당시에는 사교상에도 필수 불가결한 학문이었다.

현대의 물질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기의 직계조상(直系祖上)의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이 괴이할 것조차 없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 행세를 한다는 집안에서는 자기 조상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남의 조상의 이름도 모두 기억하여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조상 이름과 발음이 같은 낱말은 피하여 주는 것이 서로 지켜야 하는 예절이었으니 말이다.

송창공(松窓公)은 우리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옥헌공(風玉軒公 : 守倫)의 손자, 처사공(處士公 : 滌)의 아들이요 창강공(滄江公 : 涑)의 조카이다. 공이 씨족원류(氏族源流)라는 보서(譜書)를 편찬하게 된 동기도 알고 보면 우리 시조 이하의 실전된 대계(代系)를 찾아내기 위한 욕구에서였는데, 하다보니 전국 성씨의 선계(先系)를 손대게 되어 씨족원류를 편찬하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상과 같은 경위로 시조이하 6세 실전이라는 확증을 얻은 것인데, 그러나 행여 미심쩍은 점이 있어 전직공을 7세손이라 직서하지 못하고 후손(後孫)이라 표기했으며, 세대수도 전직공을 1세로 기산(起算)하기로 하였으니 선조들께서 보계를 다룸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양주 시중공 산소나 견성암(見聖庵)일로 아차산 아래를 지날 때마다 석간공을 생각하곤 한다. "석간공의 묘소가 어디쯤 있었을까? 옛날에는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중종(中宗)시대에 여울목을 수비하던 승군(僧軍)들이 빼어다가 신천(新川)의 물속에  집어던져 버렸다 하니 그 빗돌은 지금도 어느 곳엔가 묻혀 있을 게고, 그 빗돌만 찾아내면 고려사의 잘못도 정정하고 우리 보첩상(譜牒上)의 의혹도 풀릴텐데"하고.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회양공의 제2자 사옹원정공(司饔院正公 : 開平)의 계자(繼子)에 관해서이다. 신해보(辛亥譜)에는 사옹원정공 이름 밑에 무후(無后)로 달려있던 것을 이 때에 그 백씨인 좌랑공(佐郞公 : 安平)의 제4자인 장사랑공(將仕郞公 : 厚之)를 출계시켰으니, 이 또한 전부터 이설(異說)이 있었던 것을 확정지은 것이었다.

그 이설의 근원은 장사랑공의 장자(長子)인 주부공(主簿公 : 益祚)의 묘문(墓文)에 "양 할아버지 사옹원정공께서 매우 사랑해 주셨다(養祖 司饔正 趙某 奇愛之)"라는 문구와 풍양군(豊壤君 : 世勛)의 묘지(墓誌)에 "사옹원정공께서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附하여 後로 삼았다(司饔正 某 無嗣 附爲後)"라느 문구 때문이었다.

주부공 묘문의 경우, 양할아버지라 한 양(養)자의 뜻이 계자(繼子), 곧 세속적으로 말하는 양 아들이라 할 때의 양자와 같은 뜻이냐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데려다가 길러(養)주었기 때문에 양할아버지라 한 것이냐는 두 가지 해석이 있었던 것이며, 풍양군 묘지의 경우, 부(附)자 뜻이 무엇이냐는 문제로 의견이 구구했었다.

예의 씨족원류에는 분명히 계자로 되어 있었으니, 그대로 데려다가 길러준 양할아버지는 아닐 법도 한데, 신해보 때에는 신빙성이 없다 하여 사옹원정공 밑에는 무후로 달고, 장사랑공은 생가의 원 위치에 기록했던 것을 이 때에 여러 문적을 다시 상고한 끝에 "무후로 다는 것은 미안하다"는 결론을 내려 출계(出系)로 판정을 내렸던 것이다.

지난 1959년 봄에 동탁(童濯 : 산에 나무나 풀이 전혀 없음)했던 덕림종산(德林宗山)에 큰 조림 행사를 실시할 때 필자는 당시의 화수회장이시던 소은공(笑隱公 : 大衍)과 덕림병사(德林丙舍)에서 며칠을 유숙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소은공은 회양공 비문을 보고 나서 그 비문에는 " 장사랑공(將仕朗公 : 厚之) 자손이 한산군(漢山君 : 溫之) 자손보다 먼저 기록되었다."하여 "잘못된 일"이라 지적하기로 나는 좀 미안한 생각을 가졌었다. 그랬다가 그 후에  필자는 신해보와 경진보를 대조하고 나서 "그 때에는 그렇게 기록하는 것이 정상이었다"는 경위를 말씀드렸더니 그 분도 "비로소 알았다"면서 서로 웃는 일이 있었다.

이 밖에도 금주공파(錦州公派 : 임)의 잘못된 댓수를 시정하고, 신해보에는 남녀 구별없이 연령순으로 기록했던 것을 선남후녀(先男後女)로 기록하고, 배위(配位)와 자질(子姪)이 뒤바뀐 것을 바로 잡는 등, 여러 군데에 걸쳐 일대 수정을 가하였다. 그리고 신해보 때에는 남원공파(南原公派 : 季팽)의 수단이 완성되지 못하여 동보치 못했던 것을 이 때에 비로소 동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수정작업을 통고함과 아울러 각파의 수단을 해 들이라는 통문을 발송한 것이 영조 35년(1759)이고, 두 번 째의 족보를 출간한 것이 그 이듬해인 경진년(庚辰年, 1760)이었으니 "어떻게 그처럼 단시일 내에 간행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간다. 그런데 당시의 주관자였던 영호공(永湖公 : 엄)의 서신에 의하면 "10년간의 경영이 이제야 완공되었다(十載 經營 今時訖功)"하였으니 미리 할 수 있는 일은 미리 했던 것으로 추측되기는 하나 여하튼 빨리 된 것만은 사실이다.

총 909판, 부록을 아울러 10책으로 제본하였는데 서문은 무주공(茂朱公 : 祉命, 당시는 옥천군수(玉川郡守)였음)께서 쓰고 발문은 영호공께서 썼는데, 영호공께서 당시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대구 감영에서 간행하였고, 그 보판(譜板)을 상주 남장사에 보관하였다.

영호공은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감자씨를 가져다가 우리 나라에 재배시켰던 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공은 사람됨이 괴걸스러워 정당한 일에는 어찌나 자기 주장이 강했던지 영조대왕께서도 다루기에 힘겨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영조께서는 공을 지칭할 때 좋아도 "조고집(趙固執)", 언짢아도 "조고집"이라 불렀다 한다. 권부생활(權府生活)이란 언제나 기복이 많은 것, 공의 일생도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만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에 몰려 김해의 배소(配所)에서 생을 마치게 되거니와, 아무튼 간에 공의 가문이 공으로 인하여 사부가(士夫家)로서의 기반이 더욱 튼튼하게 닦여진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