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본래 성(姓)을 쓰지 않았다가 삼국시대 이후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잦아짐에 따라 점차로 성(姓)을 갖게 되었다. 그 붐을 이루었던 시기가 고려(高麗) 초기였는데, 우리도 이때에 득성(得姓)한 성씨다

선대(先代)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의 시조(始祖)이신 시중공(侍中公)께서는 풍양(豊壤)의 득성이, 곧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南楊州市 眞乾面 松陵里)에서 출생하셨는데, 이름을 바위(岩이란 뜻)라 불렀다. 그곳에서 농사 짓고 살면서(숯을 구으셨다는 설도 있음) 도(道)를 닦았는데, 불가에서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친견(親見)하셨다."는 설이 전해 오는 곳을 보면, 그 당시의 실정으로 미루어 유불(儒佛) 공부를 겸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곧 심신수양(心身修養)은 불교(佛敎)에 의하고, 제세경륜(濟世經綸)은 유학(儒學)에 의하여 하신 것으로 추측된다.

만년에 이르러서야 고려 태조(太祖)의 방문을 받고 그 길로 태조를 따라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우셨으므로 고려 개국 공신이 되고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셨다. 그 때에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下賜)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씨(姓氏)를 쓰게 된 원인이다. 성이 없던 사람이 성을 쓸때는 그 나라 임금이 성자(姓字)를 지어주는 경우, 곧 사성(賜姓)의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두 가지가 있는데, 그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어느 쪽도 없으니 지금에 와서 무어라 단정 할 수는 없다.

다만 득성조(得姓祖)라는 선조들의 기록이 있고, 그 이전에는 조씨(趙氏) 성자를 쓴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 조씨중에는 가장 오랜 성씨가 됨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고려 때에 어떤 방법에 의하여 세계(世系)가 유지되어 왔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행정관청에서 인사기록을 비치하는 뜻에서 벼슬아치들의 세계(世系)를 정리 보관해 왔던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제각기 자기 가문의 기록을 아는 데 까지 기록하여 전한 것이다. 어느 것이었던 간에 그 규모는 극히 제한된 것이고 내용도 소략한 것이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가문임을 막론하고 고려 시대 이상의 기록은 소략한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고려 초기에는 성씨 갖기 붐이 있었고, 조선 초기에는 족보갖기 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은 기반이 잡히자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을 썼고, 인재등용에 가문(家門)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족보 붐이 일기 시작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체계를 세워 간행된 족보가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라 한다. 성화(成化)란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年號)로서 현재 서기(西紀)를 통용하듯이 썼던 연호이며, 성종(成宗) 7년(1476)인 병신년(丙申年)에 간행된 족보이다.

이 족보는 조선 초기의 대문장가인 양촌공(陽村公 : 權近)의 아들 문경공(文景公 : 權제)이 비로소 조그만 가승(家乘)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 아들인 길창군(吉昌君 : 權擥)이 선지(先志)를 받들어 규모를 대폭 확대시켜 작업하다가 또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양촌공의 외손자가 되는 사가공(四佳公 : 徐居正)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사가공이 그 작업을 할 때에 본손이 되는 권씨(權氏)로서는 참여한 사람이 없었고, 또한 외손 계통인 상주판관 박원창(尙州判官 朴元昌), 대구부사 최호원(大丘府使 崔灝元)과 함께 하였다. 인쇄도 경상감사 윤호(慶尙監司 尹壕)에 의뢰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간행되었다.

성화보는 계통을 따라 이름을 쓰고 관직만을 약기한 도보(圖譜)인데 외손들에 의하여 간행되었으므로 본손 계통보다는 외손 계통이 더 상세하게 기록된 것이 특징이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모든 일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명종 17년(1562)에 이루어진 문화류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가 있어, 비교적 규모가 짜여진 족보로 전하고 있으나 아직 열람할 기회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풍양조씨 족보(族譜)는 창강공(滄江公 : 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창강공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성사하자 그 날로 시골(경기도 광주의 수곡)로 돌아가 훈명(勳名)을 극력 사퇴하였고, 그 후에 지방 관직을 거쳐 중앙 관직인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에 그쳤는데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됨), 벼슬을 탐탁잖게 여기고 오직 학문과 서화로 일생을 깨끗이 보낸 분이다. 보학에도 연구가 깊어 자기 조상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소상하게 알려 줄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공은 일찍이 시조 시중공의 사적을 쓰고 회양공의 묘표를 지었으며, 가보(家譜)를 만들었다.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던 하서공(荷棲公)의 문집에 의하면 뒤에 말할 송창공(松窓公 : 從耘)께서 유명한 씨족원류(氏族源流)라는 만성보(萬姓譜)를 편찬할 때 그의 숙부인 창강공의 지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은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와 못지 않은 피해가 곧 문화재의 파괴, 소실과 약탈이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에 많은 문헌을 소실, 또는 약탈 당했으므로 인조 이후 숙종 때를 기하여 소실된 문헌의 재정리 작업이 활발하였다.

창강공의 수보작업(修譜作業)도 이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무렵에 상주(尙州)에서는 검간공(黔澗公)의 장남인 초은공(憔隱公 : 基遠)이 또한 가보(家譜)를 닦았고, 임천(林川)에서는 동곡파(東谷派)인 취수정과(醉水亭公 : 始鼎)이 그 아우인 지중추공(知中樞公 : 始晉)과 함께 족보 수정작업을 실시하였다. 그 수정본에 명곡공 최석정(明谷公 崔錫鼎)이 서문을 썼다. 그것이 오늘까지 전하는 우리 족보의 맨 위에 붙는 풍양조씨 족보서(豊壤趙氏族譜序)이다

이상과 같은 족보편찬 사업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업이었고, 대동적(大同的)인 성격을 띠게 되려면 회의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기록상으로는 우리 조씨가 처음으로 대종회(大宗會)를 소집했던 것이 인조 8년(1630) 10월 10일에 평장(平葬)됐던 시조의 묘소를 다시 봉축하고 제사를 올렸을 때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뜸했다가 숙종 41년(1715)인 을미년(乙未年) 4월 5일에 동강공(東岡公 : 相愚)의 발의(發議)로 열렸던 종회가 일기를 획하는 표본으로 손꼽히게 되었는데, 이 때에 비로소 족보를 간행하자는 발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에 각가(各家)에서 가지고 있는 가승(家乘)이 수합(收合)되었다. 그 중에서 취수정공의 것이 가장 나은 것으로 인정을 받아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여러 초본과 대조하고 각지에 연락하여 산증(刪增)을 가하게 되었는데, 동강공의 종손(從孫)인 귀락정공(歸樂亭公 : 景命)이 그 일을 담당하여 10여년간의 오랜 작업을 한 끝에 3책의 초고(草稿)가 완성되었다.

그 책이 간행되기 전에 발의자인 동강공과 주간자인 귀락정공이 전후하여 모두 별세하고 말았다. 그 나머지 작업을 귀락정공의 장자인 현감공(縣監公 : 載健)이 계승, 선사(繕寫)하여 강원감영(江原監營 : 原州)에서 간역(刊役)에 회부하였다. 그 때 또한 동강공의 종손(從孫)인 묵소공 석명(墨沼公 錫命)께서 강원관찰사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조 4년 무신년(1728) 3월에 간역이 거의 완료되어 또한 일문(一門)인 귀록공(歸鹿公 : 顯命)께서 "간역이 끝나는 대로 그 판각(板刻)은 양주 견성암(楊州 見聖庵)에 보관할 계획"이라는 발문(跋文)까지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중단되고 말았으니, 그 때 청주(淸州)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인좌는 소론의 과격파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가 영조의 등극으로 숙청되었던 김일경(金一鏡)의 잔당으로서 정희량(鄭希良)과 공모하여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친척을 강원감사로 보내려고 "원주는 청주와 가까우니 수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묵소공을 내직으로 소환하게 된 것이다. 다 되어가던 우리 족보의 간행사업은 중단, 폐기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3년 만인 영조7년 신해년(1731)에 귀록공께서 관찰사로 있던 경상감영(慶尙監營 : 大邱)에서 간행되었다.

숙종 을미년에 발의하고서부터 무려 17년만에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이 책이 바로 조씨의 창간보인데 모두 3책의 목판본이다. 현재까지도 그 때의 판본이 더러 남아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부여 덕림(扶餘 德林)의 회양공 재실(淮陽公 齋室)에 한 질이 보관되어 있고, 지난 기미년(1979) 봄에 한국에 와 있던 미국 하바드 대학 교수인 "와그너"박사가 시중에서 구입한 질을 우리에게 기증하여 주어 화수회에 보관하게 되었다.

그 양식과 규모는 앞서 말했던 안동권씨의 성화보보다는 훨씬 조밀하고 발달된 것이었다. 자녀를 기록하는 순서에 있어서 오늘날과 같이 남선 여후(男先女後)로 하지 않고 연령순으로 하였기 때문에 남녀가 뒤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귀록공이 쓴 지문(識文)에 의하면 "착수하고부터 17년이 경과하는 동안에 출생, 사망 혼가(婚嫁), 과환(科宦)등의 인사변동이 많을터인데 멀리 있는 분들과의 연락이 어려워 고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하였으니 교통과 통신이 아주 어려웠던 당시의 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판각을 상주 청계사(尙州 淸溪寺)에 보관한다"하였는데 이후에 말할 경진보(庚辰譜) 때에 남장사(南長寺)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판각(板刻)이란 나무판에 글씨를 도장을 새기듯이 일일이 조각한 인쇄 원판이다. 일찍이 동활자(銅活字)가 만들어져 이용되기는 하였지만 인쇄의 대종(大宗)은 역시 목판각(木板刻)이었다. 이 판각을 보관하려면 따로 집을 지어 시렁을 매고 순서대로 배열하여 간수하게 되며,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이 판각을 절에 보관했던 것은 한적하고 정결하며 승려들은 문화재를 이해하는 지식층이었으므로 보존에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