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공 조종돈(淸道公 趙宗敦 / 1497~1565)

 

朝散大夫淸道郡守豐壤趙公墓表 원문

 

公姓趙諱宗敦字叔厚豐壤人高麗開國功臣門下侍中諱

孟後曾祖諱溫之縣令祖諱益貞參判漢平君考諱彭進士

妣固城李氏縣監嗣孫女左議政原玄孫公生以燕山丁巳

筮仕歷軍資監僉正乙丑五月十八日終于淸道郡任所壽

六十九返葬于楊州廣巖先考墓左麓甲坐原配缶溪洪氏

生員彦國女大提學涵虛亭貴達孫與公同年生終于辛未

二月十二日壽七十五墓祔公墓雙墳有三子四女男曰廷

榦判官子孫居山壇大田等地曰廷權贈司僕寺正子孫居

金浦丹陽鎭岑扶餘聞慶文岩等地曰廷樑以孝贈左承旨

子孫居金浦西井里抱川豐德等地側出男曰丹生无考女

適星山李廷老安東金應生進士淸州韓个壽餘不錄

 

十三世孫駿九謹撰

 

▼ 청도공(淸道公) 묘소

 

▲ 청도공 조종돈(淸道公 趙宗敦) 묘역(墓域) 치수공사 후 좌측 전경, 우측 후경

※ 소재지 : 양주시 광사동 산 102-1(군부대 내) /

(2011.11. 6. 돌계단, 사자상, 장명등석 설치. 2014.10. 3 제문석, 병풍석 설치)

이 사업은 청도공파종중(회장 조동연)에서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묘역 치수작업을 하면서

주변에 주목과 옥향 등을 식목하였다.

 

조산대부청도군수풍양조공묘표  해석문

 

공의 성은 조(趙) 이름은 종돈(宗敦) 자(字) 숙후(叔厚)이고 풍양인(豐壤人)이니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문하시중 조맹(門下侍中 趙 孟)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조온지(趙溫之)이니 현령(縣令)이고, 할아버지는 조익정(趙益貞)이니

참판(參判) 한평군(漢平君)이고 아버지는 조팽(趙彭)이니 진사(進士)이며,

비(妣)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니 현감(縣監) 사손(嗣孫)의 딸이고 좌의정 이원(李原)의 현손(玄孫)1) 이다.

 

공은 1497년(연산군 3) 출생하였고 서사(筮仕)2) 로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거쳐

1565년(명종 20) 5월 18일에 청도군(淸道郡)의 임소(任所)에서 돌아갔으니 향년 69세였다.

양주시(楊州市) 광암선고묘(廣巖先考墓) 좌측 기슭 갑좌(甲坐)언덕에 반장(返葬)3) 하였다.

배(配)는 부개홍씨(缶溪洪氏)이니 생원 언국(彦國)의 딸이고 대제학 함허정(涵虛亭) 귀달(貴達)의

손이다. 공과 동년생이고 1571년 2월 12일 돌아갔으니 향년 75세였으며 묘소는 공묘(公墓)와

쌍분으로 부장(祔葬)했으며, 갈석(碣石)4) , 환석(還石)5) ,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6) 이 있다.

 

3남 4녀를 두었으니 큰 아들 정간(廷榦)은 판관(判官)인데 자손이 산단(山壇) · 대전 등지에 살고 있고,

둘째 아들 정권(廷權)은 증 사복시정(贈司僕寺正)인데 그 자손이 김포(金浦) · 단양(丹陽) · 진잠(鎭岑) ·

부여(扶餘) · 문경(聞慶) · 문암(文岩) 등지에 살고 있다. 셋째 아들 정량(廷樑)은 효행(孝行)으로

증좌승지(贈左承旨)인데, 자손이 김포(金浦) · 서정리(西井里) · 포천(抱川) · 풍덕(豐德) 등지에 살고 있고,

작은 부인 소생 단생(丹生)은 후예무고(后裔无考)이며, 딸은 성산 이정노(星山 李廷老),

안동 김응생(安東 金應生, 進士), 청주 한개수(淸州 韓个壽)에게 출가하였다.

 

<註>


1) 현손(玄孫) : 고손(高孫)과 현손(玄孫)은 같은 뜻. 손자의 손자 즉 「5세손」을 일컫는 말인 「현손」은 때때로 손자에게 높다는 뜻인 「높을 고(高)」자를 쓸 수 없다고 하여 일컫는 낱말하기도 하다.  

2) 서사(筮仕) : 처음으로 관직(官職)에 나감

3) 반장(返葬) : 객지(客地)에서 죽은 이의 시체(屍體)를 제가 살던 곳이나 고향(故鄕)으로 옮겨 장사(葬事)를 지냄.

4) 갈석(碣石) :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

5) 환석(還石) : 병풍석

6) 망주석(望柱石) : 무덤 앞 양 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대가리가 얹히어 있음

 

청도공 조종돈 제문비(淸道公 趙宗敦 祭文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