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공 독암 조종경(典翰公 獨菴 趙宗敬  / 1495~1535)

 

1495(연산군 1)∼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백(孝伯), 호는 독암(獨菴)1) 이다. 조온지(趙溫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익정(趙益貞)이고, 아버지는 조팽(趙彭)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현감(縣監) 사손(嗣孫)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를 거쳐, 152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 · 부수찬 · 정언 · 수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524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가,

1526년 지평을 거쳐 비로소 취임하게 되었다.

그 뒤 장령 · 사간 · 전한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531년 사섬시 정(司贍寺 正)으로 재직하던 중 심정(沈貞)의 당여(黨與)라는 김안로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과천에 물러나 있게 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신원(伸冤)2) 되고, 죽은 뒤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암유고(獨菴遺稿)』가 있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행 력

왕   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연산군1

1495

을묘

홍치(弘治) 8

1

○ 태어나다.

중종 11

1516

병자

정덕(正德)11

22

○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다.

중종 15

1520

경진

정덕(正德)15

26

○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합격하다. ○ 홍문관 정자가 되다.

중종 16

1521

신사

정덕(正德)27

 

○ 승정원 주서로 재직하다.

중종 17

1522

임오

가정(嘉靖) 1

28

○ 6월, 부수찬이 되다. ○ 8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중종 18

1523

계미

가정(嘉靖) 2

29

○ 1월, 홍문관 수찬이 되다.

중종 19

1524

갑신

가정(嘉靖) 3

30

○ 궐직(闕直)하여 병조 정랑에서 파직되다.

중종 20

1525

을유

가정(嘉靖) 4

31

○ 1월, 황해도 어사(黃海道 御史)로서 강령 현감(康翎 縣監)의 불법행위를 치계하다.

중종 21

1526

병술

가정(嘉靖) 5

32

○ 8월, 사헌부 지평이 되다.

○ 9월, 이조 정랑이 되다.

중종 24

1529

기축

가정(嘉靖) 8

35

○ 2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 6월, 사간원 사간이 되다.

○ 11월, 사헌부 집의가 되다.

중종 25

1530

경인

가정(嘉靖) 9

36

○ 4월, 홍문관 전한이 되다.

○ 5월, 사헌부 집의가 되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환조(還朝)를 반대하여 사담시 정(司贍寺 正)으로 체직되다.

○ 12월,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다. 과천의 청계산 아래 호계(虎溪)로 물러나 당호(堂號)를 ‘독암(獨菴)’이라고 하다.

○ 아들 조청추(趙廷樞)가 태어나다.

중종 30

1535

을미

가정(嘉靖)14

41

○ 아들 조정기(趙廷機)가 태어나다.

○ 10월 29일, 병으로 졸하다. ○ 양주 광암리(廣巖里)에 장사 지내다.

중종 32

1537

정유

가정(嘉靖)16

○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신원(伸寃)되다.

○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 되다.

선조 20

1587

정해

만력(萬曆)15

○ 아들 온양 군수 조정추(溫陽 郡守 趙廷樞)가 유고를 활자로 초간(初刊)하다.

인조 21

1643

계미

숭정(崇禎)16

○ 증손 부평 부사 조흡(富平 府使 趙潝)이 문집을 목판으로 중간(重刊)하다.

영조 36

1760

경진

건륭(乾隆)25

 

○ 7대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이 상주(尙州)에서 문집을 목판으로 3간(三刊).

 

<註>


 

1) 독암(獨菴) : 「菴」자를 「庵」으로 잘 못기록 된 곳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세보(世譜)와 세록(世錄)의 기록을 존중한다.

2) 신원(伸冤) : 원통한 일이나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풀어 버림

 

 

 독암유고 (獨菴遺稿)

 

 ● 저자 : 독암(獨菴) 조종경(趙宗敬)

 ● 참조 : 풍양조씨 세록(1981) 1책 562면

 

권  수  제 : 독암유고(獨菴遺稿)

간        종 : 목판본(木版本)

간  행  년 : 1760년

권        책 : 불분 권(不分 卷) 1책  

행        자 : 10행 20자

규        격 : 21.2×16.2(cm)

어        미 :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소  장  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도서번호 : 奎6219  /  5563.7.4034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속 2

저자성명 : 조종경(趙宗敬 1495-1535)

생        년 : 1495년(연산군 1)

몰        년 : 1535년(중종 30)

      자       : 자신(子愼), 효백(孝伯)

      호       : 독암(獨菴)

본        관 : 풍양(豐壤)

특기사항 : 정경(鄭褧), 박소(朴紹) 등과 교류

 

공의 자는 효백(孝伯), 호는 독암(獨菴), 진사공 팽(彭)의 자, 한평군(漢平君) 익정(益貞)의 손이요, 회양공(淮陽公) 신(愼)의 5대손이다. 연산군 원년 을묘(1495) 출생하여 중종 30년 을미(1535)에 별세하니 향년이 41세였다. 중종 15년 경진(庚辰, 1520)의 별시문과(別試文科)에서 을과 제2인으로 급제하고 남상(南床 : 弘文館 正字), 전랑(銓郞 : 吏·兵曹의 正郎과 佐郞)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 : 弘文館의 從三品)에 머물렀다.

 

중종 25년 경인(庚寅, 1530)에 풍덕(豐德)에 유배(流配)되어 있던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간교한 술책에 의하여 다시 입조하게 되자 공은 야천 박소(冶川 朴紹),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함께 그의 등용을 적극 저지하려다가 그들 일당의 반격으로 야천(冶川)은 합천(陜川)으로 회재(晦齋)는 경주(慶州)로 돌아갔으며, 공은 생존해 계신 노모 때문에 가까운 과천(果川)의 호계(虎溪) 마을로 돌아가 청계산(淸溪山) 아래 집을 지어 독암(獨菴)이라 하고 이곳에서 6년 후 하세하였다.

 

이 유고(遺稿)는 공이 평생에 음영(吟咏) 3) 한 시작(詩作)을 수습하여 간행한 것인데, 그의 장남인 사예공 정추(司藝公 廷樞)가 온양군수(溫陽郡守)로 있던 선조 20년 정해(丁亥, 1587)에 군에 있는 활자로 인출(印出)하였고, 그 후 영조 36년 경진(庚辰, 1760)에 그의 7대손인 영호공 엄(永湖公 曮)이 경상감사 시 감영에서 목판으로 중간하였는데 그 판본은 상주(尙州)의 보각(譜閣)에 저장되어 있다.

 

선배들의 서발문(序跋文)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공의 시작(詩作)은 호계에 은거할 때의 작품이 많으며, 평소의 상념을 자연스럽게 표현함으로 혼후(渾厚) 4) 한 덕성, 고매(高邁) 5) 한 인격과 아울러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접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공은 별세(別世) 후에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註>


3) 음영(吟咏) : 시가(詩歌) 따위를  읊음.

4) 혼후(渾厚) : 화기가 있고 인정이 두터움.

5) 고매(高邁) : 인격이나 품성, 학식, 재질 따위가 높고 빼어나다.

 

 

▣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야천 박소(冶川 朴紹),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함께  김안로(金安老)의 환조(還朝)를 반대하다가 1530년에 김안로 일파에게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이에 저자는 과천 청계산(果川 淸溪山)아래에 거처를 마련하여 ‘독암(獨菴)’이라고 하고 이를 자호(自號)로 삼아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저자의 시문은 둘째 아들 온양 군수 조정추(溫陽 郡守 趙廷樞)가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편차(編次)하여 온양(溫陽)에서 1587년에 활자(活字)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문집이 인행된 시기에 대해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조정추가 만력(萬曆) 15년(1587)에 지은 초간본의 발문에서, “신사년(1581)에 온양 군수로 부임하였는데,  군(郡)에 활자(活字) 몇 말이 있었다. 공인(工人)을 불러 인출(印出)하였는데 10여 일 만에 일을 마쳤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문집을 1581년에 인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러나 발문을 지은 연도와 함께 고려할 때 단정 짓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편 7대손 조엄(趙曮)이 문집을 3간(三刊)하면서 지은 발문에서, “만력 정해년(1587)에 방조 사례공 조정추(傍祖 司藝公 趙廷樞)가  임소에서 초인(初印)하였다.”라고 하여  1587년에 인행한 것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그 근거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조정추가 발문을 지은 시기와 7대손 조엄의 발문 내용에 따라 1587년에 인행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1643년에는 증손 부평 도호부사 풍안군 조흡(富平 都護府使 豐安君 趙潝)이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중간본》 이 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 후 1760년에 7대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이 구본(舊本)에 묘문(墓文)과 유사(遺事)를 부록으로 붙여서 상주(尙州)에서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고, 65판의 판목을 남장사 보각(南長寺 譜閣)에 보관하였다.

 

《삼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6219, 6332, 6978),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112, 한45-가112-2), 장서각(4-5914),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268)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7대손 조엄이 목판으로 간행한 삼간본으로 규장각장본(奎6219)이다.

 

구간서 박미 찬(舊刊序 朴瀰 撰),

중간서 정존겸 찬(重刊序 鄭存謙 撰),

발 조정추 찬(跋 趙廷樞 撰),

중간발 조엄 찬(重刊跋 趙曮 撰) 등에 의함

 

 

▣ 구성과 내용

본집은 불분권(不分卷) 1책으로, 내용은 시와 부록(附錄)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643년에 지은 박미(朴瀰)의 구간서(舊刊序)와 1760년에 지은 정존겸(鄭存謙)의 중간서(重刊序)가있다. 시(詩)는 200제(題)가 시체(詩體)에 관계없이 혼재되어 실려 있다. 간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저자가 김안로 일파에게 축출되어 서울을 떠나 과천 청계산 아래에서 눌러 살면서 지은 시가 많다. 첫머리에는 굴원(屈原), 노중련(魯仲連), 장량(張良), 가의(賈誼), 소무(蘇武), 엄광(嚴光), 제갈량(諸葛亮), 사안(謝安), 도잠(陶潛) 등 9명의 인물에 대해 읊고 있는데,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파직되어 시골에서 생활하는 저자 자신을 비유(比擬)하여 지은 시이다.

 

이어 추흥팔수용두보운(秋興八首用杜甫韻), 서회(書懷), 우음(偶吟), 잡흥(雜興), 즉사(卽事), 한거(閑居) 등 생활 속에서 느낀 감회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시, 서호계촌서(書虎溪村墅), 호계유여(虎溪幽廬), 호계우음(虎溪偶吟) 등  저자가 살던 과천 호계(果川 虎溪)에 대해 지은 시 등이 실려 있다. 맨 끝의 제흥양동헌(題興陽東軒)은 전라도 흥양의 동헌에 쓴 시로서 습유(拾遺)6)이다.

 

그리고 저자의 시(詩)에는 남과 수창(酬唱) 7) 한 시가 적은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저자가 이웃이나 친척과도 단절된 생활을 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부록은 문(文) 6편으로, 묘갈음기(墓碣陰記), 묘표(墓表), 유사(遺事), 과천호계서원제향시통문(果川虎溪書院躋享時通文), 봉안제문(奉安祭文), 춘추제향축문(春秋祭享祝文)이다. 이 중에 묘표, 봉안제문, 춘추제향축문은 박필주(朴弼周)가 지었는데, 그는 저자와 함께 탄핵을 받아 낙향한 야천 박소(冶川 朴紹)의 후손이다. 유사는 저자의 일화(逸話)를 여러 기록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 중에 첫 세 항목은 증손 조흡(趙潝)이 기록한 것이다.

 

과천호계서원제향시통문(果川虎溪書院躋享時通文)은 호계서원에 저자를 배향할 것을 촉구하는 통문이며, 봉안제문과 춘추제향축문은 저자를 호계서원에 봉안하고 제향 할 때 지은 것이다. 권미에는 1587년 저자의 아들 조정추(趙廷樞)가 유고를 초간하게 된 경위를 적은 발문과 1760년 7대손 조엄(趙曮)이 3간(三刊)하면서 지은 중간발(重刊跋)이 있다.

 

- 해제 및 일러두기 -

• 해제

  한국문집총간(속) 제002집

• 일러두기

○ 본집은 독암 조종경(獨菴 趙宗敬. 1495 : 연산군 1 ~ 1535 : 중종 30)의 문집(文集)이다.

○ 본집은 저자의 둘째 아들 조정추(趙廷樞)가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편차(編次)하여 1587년 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온양에서 활자(活字)로 초판(初刊)한  후, 증손 부평도호부사 조흡(富平都護府使 趙潝)이 1643년 목판으로 중간(重刊)하고, 7대손 경상도관찰사 조엄(趙曮)이 묘문(墓文) 등 부록을 추가하여 1760년 상주에서 목판으로 3간(三刊)한 것이다.

○ 분량은 불분권(不分卷) 1책(冊)으로 총 65판이다.

○ 본 영인저본(本 影印底本)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奎章閣藏本 : 도서번호 : 奎6219)으로서 반엽(半葉)은 10행 20자이고 반곽(半郭)의 크기는 21.2×16.2(cm)이다.

○ 본집의 표점자(標點者)는 조창래(趙昌來)이고 감수자(監修者)는 성백효(成百曉)이다.

 

※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한국고전종합DB

 

<註>


6) 습유(拾遺) : 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7) 수창(酬唱) :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 받으며 부름.

 

 

 조종경 (趙宗敬) 암행어사 기록

 

1. 생졸 1495(연산군 1)~1535(중종 30)

 

2. 급제 - 21세 1516년(중종 11)사마시 - 25세 1520년(중종 15) 별시(別試) 을과1(乙科1)

 

3. 암행어사 연보

  - 1520년(중종 15) 급제 후 주서ㆍ부수찬ㆍ정언ㆍ수찬 등을 차례로 지내다.

  - 1524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반대로 좌절

  - 1526년 지평을 거쳐 비로소 취임하게 되었다

  - 30세 1525년(중종 20) 황해도 어사로 강령현 수령의 불법한 일을 치계하다

 

4. 관련 기록

 

≪중종 052 20/01/23(임오). 황해도 어사 조종경이 강령현 수령의 불법한 일을 치계하다≫

 

황해도 어사 조종경(趙宗敬)이 치계(馳啓) 8) 하기를,

“신이 강령현(康翎縣) 9) 에 갔더니 수령이 성문을 닫고 들이지 않으므로,

신이 성문을 차서 부수게 하여 들어가서 불법한 문서를 찾아내어 함봉(緘封)하여 올려 보냅니다.

또, 형옥(刑獄)을 적간(摘奸) 10) 하니, 여자 2인을 남옥(男獄)에 섞어 가두었고,

진군(鎭軍) 11) 은 많이 모자라고, 전야(田野) 12) 는 반이 묵고,

향교(鄕校)에는 훈도(訓導)가 없고 유생 4인만이 있고,

여단·사직단(社稷壇)은 다 예문(禮文)과 같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어사가 배사(拜辭) 13) 할 때에 수령의 잘못이 크면 치계하되 작으면 올라온 뒤에

아뢰라고 분부하셨는데, 지금 조종경의 장계(狀啓)를 보면 작은 일도 치계하였으니,

하서(下書)하여 이렇게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어사가 고을에 갔는데 그 수령이 문을 닫고 들이지 않았으니,

이 일은 사체(事體) 14) 에 관계된다.

강령의 수령을 나추(拿推) 15) 하도록 하라. 조종경은 큰일이므로 치계한 것이다.” 하였다.

 

【원전】 16 집 372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자료 : 조선왕조실록, 원문번역 민족문화추진회)

 

 

<註>


 8) 치계(馳啓) : 보고서를 올린다는 뜻

 9) 강령현(康翎縣) ; 황해남도 강령군 지역의 조선 초기 행정구역

10) 적간(摘奸) : 난잡한 죄상이 있나 없나를 살피어 조사함.

11) 진군(鎭軍) : 조선 시대, 지방의 병영과 수영에 속한 각 진에 둔 지방 군대.

12) 전야(田野) : 논밭으로 이루어진 들.

13) 배사(拜辭) : 삼가 공손히 사양(辭讓)함.

14) 사체(事體) : 일의 이치와 당사자의 체면.

15) 나추(拿推) : 죄인을 잡아다 추문함.

 

 

 안양 호계서원지 (安養虎溪書院地)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虎溪洞)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터로 1681년(숙종 7)에 현재의 안양시 동안구 호계 2동 176-4에 건립되었다. 독암(獨菴) 조종경(趙宗敬,1495~1535)과 창강(滄江) 조속(趙涑,1595~1668)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하였으며, 제자들이 학문을 강론하였다.

1864년(고종 1)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이곳에서 기왓 조각과 주춧돌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호계 근린공원의 매봉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안양 호계서원지 [安養虎溪書院地] (두산백과)

 

▼ 독암공(獨菴公) 조종경(趙宗敬) 묘표(墓表)와 묘  

    ※ 소재지 : 양주시 광사동 산102-8          ▼ 묘역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