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士公 諱 彭 墳墓(진사공 휘 팽 분묘)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後麗)

공(公)의 휘(諱)는 팽(彭)이시고 자(字)는 백수(伯壽)이시다. 부(父)는 한평군(漢平君) 익정(益貞)이요. 모(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배(配)는 고성이씨(固城李氏)이니 부(父)는 현감(縣監) 사손(嗣孫)이요. 모(母)는 숙인(淑人)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공(公)은 향년(享年) 29세(歲)로서 서기(西紀) 1501년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연산군(燕山君) 7년 9월 10일에 돌아가셔서 10월에 양주 광암리(楊州廣巖里)의 동(東)쪽 인좌(寅坐) 신향원(申向原)에 장사(葬事)지냈고, 이씨(李氏)는 향년(享年) 74세(歲)로서 서기 1544년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중종(中宗) 39년 10월 14일에 돌아가

11월 25일에 공묘(公墓)의 좌측(左側)에 장사(葬事)지냈다. 공(公)은 서기 1495년 연산군(燕山君) 원년(元年) 을묘년(乙卯年)의 진사과(進士科)에 일등(一等)으로 합격(合格)하였고 이남삼녀(二男三女)를 낳았다.
일남(一男)은 종경(宗敬)이니 서기 1520년 중종(中宗) 15년 경진년(庚辰年)의 문과시(文科試)에 올랐고 이남(二男)은 현감(縣監) 종돈(宗敦)이요, 녀(女)는 현령(縣令) 조익수(曺益脩)에게 출가(出嫁)하고 다음은 현감(縣監) 한수온(韓守溫)에게 출가(出嫁)하고 다음은 생원(生員) 엄용공(嚴用恭)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내외증손(內外曾孫)이 남녀(男女)를 아울러 30여 인(餘人)이다.
 재명(才名)에 개세(盖世)하였으나 불행(不幸)히도 조몰(早歿)하였으니 아아! 애석(哀惜)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유사(遺事) -
진사공년십사입백일장작여지도부이십이중진사일등연정량상이십구요서소저지유여지도부장소상동문부양부오호통재
進士公年十四入白日場作輿地圖賦二十二中進士一等連丁兩喪二十九夭逝所著只有輿地圖賦長嘯上東門賦兩賦嗚呼痛哉
                                                                  - 역문(譯文) -
 진사공(進士公)은 나이 열네살에 백일장(白日場)에 들어가 여지도부(輿地圖賦)를 지었고 스물두살에 진사시(進士試)에 일등(一等)으로 합격(合格)하였는데 연달아 양친상(兩親喪)을 당(當)하였고 스물아홉살로서 요서(夭逝)하였다. 소저(小著)로는 여지도부(輿地圖賦)와 장소상동문부(長嘯上東門賦) 두 가지만이 남아있으니 아아! 슬프다.
                                                             - 여지도부(輿地圖賦) -
 천하(天下)를 두루 찾아다니며 노는 객(客)이 하나 있었다. 그 객(客)의 행차(行次)는 옥규(玉叫)로 수레를 끌게 하고 창리(蒼螭)를 타고 다니기도 한다. 비렴(飛廉)으로 전도(前導)하게 하고 뢰사(雷師)로 후위(後衛)를 담당(擔當)하게 한다.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광막(廣漠)한 우주(宇宙)를 소요(逍遙)한다. 남(南)쪽으로 갔다가 북(北)쪽으로 돌아오고 서(西)쪽으로 갔다가 또 동(東)쪽으로 도로 온다.
 하늘 끝 땅이 다한 곳까지 모두 유람(遊覽)하고 나서 보니 조그만 언덕 같이 다락다락한것은 오악(五岳)이 교착(交錯)된 것이요. 버려진 새끼줄처럼 꾸불꾸불한 것은 구하(九河)가 뚫린 것이며 술잔과 같이 점점(點點)이 보이는 것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의 네 바다가 뻥 둘려진 것이다. 요황(要荒)의 밖으로 뻗은 것은 만맥(蠻貊)이 된다. 성곽(城郭)이 장려(壯麗)한 것은 제왕(帝王)들의 고을이다.
 저 분수(汾水)의 양지(陽地)쪽은 우(禹)와 순(舜)이 천자(天子) 노릇을 했던 곳이요. 기산(岐山)의 언덕빼기는 문왕(文王)이 왕업(王業)을 세웠던 곳이다. 낙양(洛陽)과 같은 명승지(名勝地)는 연달아 주(周)와 수(隋)의 왕기(王畿)로 되었고 효함(殽函)과 같은 요색지(要塞地)는 진(秦)과 한(漢)의 다스리는 바가 되었다. 그리고 또 금릉(金陵)은 천하(天下)의 가려(佳麗)한 곳이니 육조(六朝)가 서로 잇달아 개기(開基)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고 기방(冀方)은 당(唐)(요(堯))가 국도(國都)를 세웠던 곳이니 명(明)나라에서 추모(追慕)하여 건도(建都)를 생각했던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북극(北極)의 빙천지대(氷天地帶)로 갔다. 남방(南方)의 화유산(火維山)에 오르며, 서방(西方)의 월굴(月窟)을 지나고 약목(若木)을 거침에 이르러서는 그 오랑캐들의 상태(狀態)를 말하자면 그들은 머리를 풀고 다니며 군장(君長)을 모시는 국속(國俗)도 없고 성곽(城郭)을 두는 제도(制度)도 없다 까마귀 떼처럼 흩어졌다가 개미 떼처럼 모여 들며 거지(居地)에는 봉역(封域)을 정(定)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조선(朝鮮)만은 황해(黃海)의 동(東)쪽에 있다. 도(道)는 팔도(八道)로 나누었고 열군(列郡)은 삼백군현(三百郡縣)이다. 금강산(金剛山)은 동(東)쪽에 있고 묘향산(妙香山)은 북(北)쪽에 있다. 남(南)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있고 서(西)쪽에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대동강(大同江)은 기도(箕都)를 띠고 흐르며 성거산(聖居山)은 송경(松京)을 누르고 있다.
 무릇 한강(漢江)은 남(南)쪽으로 흘러 출렁이고 삼각산(三角山)은 북(北)쪽으로 솟아 우뚝하다. 서기(瑞氣)를 토(吐)해 내고 영기(靈氣)를 빛어 내어 도읍이 되었으니 아름다운 기운(氣運)이 훈훈하다. 보아하니 바둑판처럼 굳게 호위(護衛)하고 있으니 만세(萬世)를 위(爲)하여 하나의 군주(君主)뿐이다.

나는 이에 실컷 보아 마음껏 즐기고 나니 얻은 것이 많았는데 오래되면 잊게 될까 두려워하여 물러와서는 그림으로 그려 소벽(素壁)에다 높직하게 걸어 놓으니 망망(茫茫)한 천지(天地)가 모두 나와 방 안에 있다. 나는 이에 그림을 어루만지면서 위연(喟然)히 탄식(嘆息)하기를
“한조각의 거친 땅덩어리가 전(傳)한지도 오래이다. 우(虞)요(堯)나라 때에는 십이주(十二州)로 나누었고 하(夏)나라 때에는 변경(變更)하여 구주(九州)로 하였다. 삼대(三代)하(夏)은(殷) 주(周)때에는 봉건제도(封建制度)였고 진(秦) 한(漢) 때에는 군현제도(郡縣制度)였다. 크게 간교(奸狡)한 이들은 기회(機會)를 엿보아 탈취(奪取)하였고 큰 덕(德)이 있는 이들은 양위(讓位)로 평화(平和)롭게 주고 받았다. 아침에는 제(齊)나라의 소유(所有)로 되었다가 저녁에는 초(楚)나라의 소득(所得)으로 되기도 하였다. 오직 존속(存續)하고 멸망(滅亡)하는 것은 모두 덕(德)이 있고 없음에 달려 있으니 아 아! 어찌 공경(恭敬)하지 않을 것인가. 얻기 어려운 것은 지위(地位)이고 보전(保全)하기 어려운 것은 운명(運命)이다. 앞에 있는 수레가 전복(顚覆)된 것을 보고 어찌 다시 전철(前轍)을 밟을 것인가! 인(因)하여 잠깐 사이의 노래를 지었으니 가로되 무협(巫峽)의 급류(急流)에는 배가 전복(顚覆)되기 쉬웁고 태행산(太行山)의 험(險)한 길은 수레가 망그러지기 쉬웁도다. 잠시 동안이라도 경계(警戒)할지니 감(敢)히 부지런히 않을손가. 이 여지도(輿地圖)를 가져다가 나랏님께 바칠까나.”

進士公 諱 彭 墓碑(진사공 휘 팽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