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조씨의 발상지는 고려시대 풍양현이니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이다.

우리 시조(始祖) 시중공(侍中公)께서는 신라말기에 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松陵) 1리에서 태어나  노년(老年)까지 사셨으며 태조 남정(南征)에 여러차례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고 맹(孟)이란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러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바위’라는 은자(隱者)한 분이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巖窟)에서 수도생활을 하고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이 찿아가 장군을 삼으니 보령 70세 였고 모습이 웅위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라고 한다.

묘소(墓所)는 세보(世譜)에 풍양 적성동(豐壤 赤城洞)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현재 이름으로는 송릉 2리이며 산하(山下)에 '적성골'이란 동네 이름이 남아 있다. 이를『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풍양현(豐壤縣)은 주(州 : 楊州 東軒 所在地)에서 동쪽으로 50리 지점에 있었다. 고구려(高句麗) 때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었는데, 신라(新羅) 때에 황양(荒壤)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 때에는 풍덕(豐德)이라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양주(楊州)에 귀속시켰다가 그후에 포주(抱州 : 現 抱川)에 귀속시켰으며 조선(朝鮮) 세종(世宗) 원년(元年 : 1419)에 다시 양주의 소속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사학계(史學界)에서는 광개토대왕비(廣開士大王碑)에 나오는 고리성(古利城)을 『골의노현』의 골의(骨衣)와 발음이 비슷하다하여 진건.진접 일대일 것으로 보는 의견(意見)이 있으니, 그렇다면 진건면 용정리(龍井里)에 있는 『고리개』라는 마을 이름도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골의노현(骨衣奴縣)이란 이름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후에는 큰 변경이 없었던 것 같으며, 지난 1980년 4월 1일자로 이 지역이 양주군에서 분리(分離)되어 남양주군(南楊州郡)이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자로 남양주시(南楊州市)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성씨(姓氏) 위에 어떤 정해진 지명(地名)을 붙이는 것을 본관(本貫)이라 하며, 관향(貫鄕) 또는 본관(本貫)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성자(姓字)는 같아도 혈통(血統)은 같지 않은 경우가 많으므로 그 시조(始祖)가 태어났던 지명(地名)을 붙임으로써 그 『혈통을 구분짓는 방법의 하나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씨(趙氏)라는 성(姓)을 쓰는 씨족(氏族)은 풍양, 한양, 함안, 양주, 평양, 임천, 배천, 옥천, 횡성 조씨 등 15본을 대본으로 꼽히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조씨(趙氏)는 풍양(豐壤)이라는 본관(本貫)을 쓰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 시조 시중공(侍中公)께서 출생하여 사셨던 곳의 지명(地名)이 고려(高麗) 초기에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豐壤縣)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풍양현(豐壤縣)은 대략 현 경기도(京畿道) 남양주시(南楊州市)의 진건면(眞乾面)과 진접면(榛接面)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地域)의 명칭이었다.

풍양조씨는 고려시대에 중간 세계(世系)의 실전으로 전직공파(殿直公派), 평장공파(平章公派 . 南原公派),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가  계파를 달리하며, 전직공파는 다시 호군공파(護軍公派), 회양공파(淮陽公派), 금주공파(錦州公派)로 분파되어 5대파로 불러온다.

고려시대부터 벼슬이 이어졌고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현창하여 문과 180여명에 정승 7명, 문형 4명, 왕비 2명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백관과 도덕문장이 배출되어  우리나라 성씨의 명문으로 일컬어 진다.

현재에도 국내외의 각계 각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 많으므로 계속 무궁한 발전이 있을것으로 기대가 된다.